오늘 미국 하원에서 건강보험 개혁법안이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결과는 219대 212, 과반인 216표보다 불과 세 표 더 나온 덕분에 개혁법안은 통과됐습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표결될 때까지 참 여러가지 과정을 거치더군요.
미국 의회의 표결과정을 진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게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느껴지는 게 좀 있었습니다.
먼저 열린 토론입니다.
토론할지 여부부터 투표를 하더군요. 여기서는 220대 206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시간은 두 시간, 민주당과 공화당에 각 1시간씩 주어졌습니다. 방식은 각 당이 그 시간안에서 자율적으로 토론자를 결정하고, 사람마다 시간을 차등해서 주는 식이었습니다. 가령,민주당 어느 의원이 나와서 몇분동안 말하겠다고 다른 의원이 소개를 하고, 소개받은 의원이 나오면 의장은 발언시간이 몇분이라고 재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는 상대당에서 같은 형태로 또 토론을 진행하는데요, 길게는 3분, 짧게는 45초짜리 토론이 있더군요. 맨 마지막에 각 당 대표가 나와서 할 때는 5분이상 주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례적으로 하원의장인 낸시펠로시 민주당 의장이 민주당측 마지막 토론자로 나섰더군요. "미국인의 꿈을 복원하고, 미국 건국자들의 꿈을 실현하고, 미국의 역사와 진보를 위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화당의 존 뵈너 의원이었습니다. 대단히 열정적인 연설이었습니다. 법안을 읽어나 봤느냐는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데, 많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둘째는 열린 투표였습니다.
야당인 공화당은 178명 전원이 반대했습니다. 문제는 여당인 민주당. 민주당 의원 253명가운데 34명이나 반대했습니다. 백악관과 지도부의 집요한 설득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은 거죠. 물론 다음 선거때 재선될 수 있느냐를 판단의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실 이번 건강보험 개혁법안은 평범한 중산층들의 보험 부담과 세금을 늘리는 것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 의원들 입장에서는 찬성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선 공약에, 실직자와 빈곤층에게 혜택을 주자는 내용이고,오바마 대통령이 온 몸을 던져 추진해온 법안이어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찬성표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더군요.
셋째는 토론의 목표가 명확하다는 겁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 모두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의원들을 겨냥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은 "역사와 미국의 진보를 위해서"를, 공화당 의원들은 "우리 후손들의 부담을" 강조했습니다. 한 사람 발언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가 터져 나오고,가끔씩 비아냥 대는 소리도 들렸지만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토론 과정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할 말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논리를 의원들 나름대로 정리해서 짧은 시간안에 전개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넷째는 결과에 대한 승복입니다.
공화당은 전력을 다해 반대했지만 투표과정에서 물리적 저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 의회 민주주의의 전통이 미국 의회정치를 성숙시켰다는 얘기가 괜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비록 법안 저지에는 실패했지만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점도 작용한 듯 합니다. 수정안은 상원에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통해서 저지하거나 내용을 대폭 수정할 수 있고, 이도 저도 안되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 뒤, 승리하면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철회하겠다는 거죠.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하겠다는 겁니다. 저도 블로그를 통해서 두어차례 얘기한 적이 있지만 바로 이 점을 우리 정치권,특히 야당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억울하고 힘들겠지만 새로운 의회정치의 틀은 야당이 깃발을 들어야 하는 게 우리 현주소입니다.
다섯째는 복잡한 입법 절차입니다.
상원과 하원 양원제도를 시행하다보니 입법절차가 우리보다는 상당히 복잡하더군요. 우선 상원과 하원이 같은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켜야 법안으로서 확정됩니다. 오늘 하원이 통과시킨 법안은 지난해 12월 상원이 통과시킨 법안 그대로입니다.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이 내일 서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원은 잠시 뒤에 수정안도 통과시켰습니다. 지난해 상원을 통과한 안중에는 특정 주(state)에 혜택을 주는 내용등이 포함돼 있어서 이런 내용을 삭제하는 수정안을 하원이 마련한 거죠. 이 수정안은 다시 상원에서 그대로 통과돼야 법안이 됩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상원에서 공화당의 의사진행방해없이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수퍼 60석을 상실했습니다. 의석이 57석인거죠. 민주당 성향 무소속 의원 2명을 합해도 59석뿐이 안되고요. 공화당은 바로 이 지점을 2차 전투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여섯째는 오바마의 열정입니다.
오바마는 이번 건강보험 개혁법안의 의회통과를 위해 인도네시아 방문일정을 두차례나 연기하는 외교적 결례까지 불사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오바마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추억이 어린 곳이지만, 자신이 대선때 약속한 핵심적인 개혁작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결연함을 이번에 미국인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대여섯곳의 타운홀 미팅에서 건보개혁의 당위성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마치 대선 유세처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법안의 통과를 위해 막후에서 민주당 반대파의원들의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하는 정치력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은 일단 "미국 역사에서 개혁작업을 성공시킨 드문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철저하게 당파적인 투표를 통해 법안이 통과됐다는 점에서 그 결과도 오로지 오바마가 져야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6시간 이상 텔레비젼과 인터넷을 지켜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치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법안 통과 과정을 자세히 지켜본 것은 유익했습니다. 무조건 한국 정치권이 잘못됐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미국 의회 정치에서 배울 것은 있다는 생각은 하게 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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