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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피해구제법, 이번엔 제정될까?

심영구

입력 : 2010.02.18 08:31|수정 : 2010.02.18 08:31

의사특혜법 논란


0. 의료사고 관련 법이 20여 년 만에 제정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1. 약사를 그야말로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988년 의사협회, 의료사고 처리에 대한 특례법 제안,

1991년 병원협회-의사협회, 의료피해보상구제법안 입법청원,

1994년 정부, 의료분쟁조정법안 제출,

1997년 김병태 의원, 정의화 의원, 각각 의료분쟁조정법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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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이원형 의원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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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기우 의원안, 박재완 의원 소개 청원 제출,

2006년 안명옥 의원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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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최영희 의원, 의료사고 피해구제법안 제출

          6월 심재철 의원, 의료분쟁조정법안 제출

          7월 박은수 의원, 의료사고피해구제법 제정을 위한 청원 소개


2009년 12월 29일 복지위 대안 통과,

2010년 2월 16일 법사위 상정, 법안심사 2소위 회부

1988년 첫 제안이 나왔고, 1994년에는 처음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그동안 제출된 법안들이 이번 18대 국회를 빼더라도 7개나 되는군요.

이 법안들은 소관 상임위인 복지위에서, 혹은 그 다음 단계인 법사위에서 논의되다, 의결되지 못한 채 국회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폐기됐습니다. 그리고 2010년 2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분쟁조정법안'이 법사위 상정 단계까지 왔습니다. (법 제정이나 개정안이 제출되면 통상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 이렇게 3단계를 거쳐야합니다.)

2. 본회의가 열리면 하루에 수십 건의 법안들이 통과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왜 이렇게 법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까요. 의료사고를 사고로 보냐, 분쟁으로 보냐, 피해 구제에 중점을 둘 것인지, 분쟁 조정을 우선으로 할 것인지, 각각 관련단체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핵심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1) 입증책임의 전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뭔가 잘못됐다? 환자와 가족들은 대개 의료사고라고 주장하고, 병원측은 대개 아니라고 하겠죠. 의료사고다, 아니다, 주장이 엇갈리면서 잘 해결이 안되면 소송까지 가기도 하는데(일년에 1천 건이 넘는다지만,,) 이때 의료사고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병원측의 치료, 조치가 잘못됐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그걸 입증하는 책임은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는 쪽, 즉 환자측에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며 시비를 거는 쪽에서 왜 문제인지를 찾아내는 건 자연스러워 뵙니다. 그러나 의료사고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게 자연스러울지언정 공정하지는 않다는 의견이 제기됐습니다.

일단 모든 증거를 의료인측이 갖고 있는데다 전문지식이 없는 환자, 가족들은 병원측의 진료행위가 어떤 게 맞는지, 어떤 부분이 빠졌는지, 어떤 약을 쓴 게 적절했는지, 수술시 필요한 조치는 다 취해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설사 제대로 작성된 모든 진료기록을 확보했다고 해도 용어부터 알아먹기 힘듭니다. (의료사고 소송을 수년간 해온 분들은 대개 의학서적 몇 권씩을 뗀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이 전문가들(대부분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이 자원봉사하는 것도 아니다보니 소송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비싼 돈을 들여도 승소할 확률, 20%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특성상, 의료사고에서는 환자측이 의료진 과실을 입증하는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의료진이, 치료행위에서 과실이 없었다는 걸 입증하도록 하는 게 입증책임의 전환입니다.

2) 형사처벌 특례

민사소송과 함께 형사처벌 절차도 진행되는데요, 조정이나 합의가 이뤄졌더라도 검사 판단으로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상죄를 적용해 기소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더라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특례를 적용해 조정.합의를 한 피해자 의사에 반해 공소 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해달라는 게 형사처벌 특례입니다. (중대과실(상해로 인한 생명의 위험, 장애, 불치, 난치에 이르렀을 때)은 제외됩니다.)

달리 말하면 반의사불벌죄를 적용하라는 것인데요, 민사소송에서 의사가 패소할 경우엔 형사쪽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중 처벌을 받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혹은 민사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형사쪽에서는 처벌받는 경우가 있어서 모순이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다고 하고요, 이런 특례가 적용되지 않으면, 의사들이 어떻게든 소송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소송까지 가더라도 패소하지 않기 위해 소극적인 방어진료에 치우치게 되고, 또 불필요한 검사까지 하느라 국민 의료비 부담이 커지며, 의료사고 위험이 큰 외과 같은 곳에는 지원을 하지 않게 되는 경향도 생길 것이라는 게 의료계 주장입니다. 또 의료사고 분쟁기간도 짧아지는 효과까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네요.

3.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인 법안은 최영희, 박은수, 심재철 세 의원의 법안을 한데 합쳐 복지위원장 대안으로 채택돼 통과된 안인데요, 입증 책임의 전환 조항은 삭제됐고, 형사처벌 특례 조항은 포함됐습니다.

이 두 조항은 사실 연동된 것은 아니지만, 의료계와 시민사회계의 의견이 대립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주고받는 차원에서라도 함께 들어가야 할 조항들인데 복지위 논의과정에서 전자는 빠지고 후자만 남게 됐습니다. 그래서 경실련, 의료소비자시민연대 등이 들어가있는 <의료사고 피해구제법 제정을 위한 시민연대>에서는 '의사특혜법'이라면서 이대로 법이 제정되는 걸 반대하고 있습니다.

4. 사실 이번 법안에서 주된 쟁점은 위의 두 가지이지만, 실제로 주요 내용은 특수법인 형태로 '한국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라는 곳을 설립해 이를 통해 의료사고의 조정.중재를 하도록 했다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 시민사회계는 대충 반대 정도의 입장 같습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제까지 있었던 의료심사조정위원회나 소비자분쟁위원회가 의료사고 분쟁 해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수백 억 예산을 투입한 새로운 별도기구가 생긴다고 해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지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비판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일단 20여년 만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조정중재원 설립을 가지고 법 제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지만, 입증 책임전환이 빠진 형사특례 도입은 막아야된다는 입장인 듯합니다.

반면 의료계는 형사특례는 도입되고 입증 책임전환은 빠졌다는 면에서 대체로 환영, 조정중재원도 설립되면 개별 의사들이 소송에 시달려야했던 상황보다는  나아질 것이라고 보는 듯합니다.

무과실 보상 도입, 대불제도 도입, 조정중재원의 인적 구성 문제 등 다른 문제들도 있지만, 현재 상황은 이런 정도입니다.

5.  형사처벌 특례 때문에 과거에도 법사위 논의 단계에서 진전이 안되면서 자동폐기된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는 18대 국회가 절반이나 남아있고, 앞서 복지위 단계에서의 여야 합의라든가, 주위 분위기가 달라서 어떤 식으로든 법 제정이 이뤄질 것 같아서, 일단 현 단계에서 기사를 썼습니다.

의사들의 고충도 이해가는 측면이 많습니다. 또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일부에서 사실상 소송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일면 타당해뵙니다. 현재처럼 소송이 일년에 천 건 이상 벌어지는 상황은 결국 변호사 배만 불린다는 푸념도 그렇습니다.

돌아보니, 짧은 뉴스기사를 쓰면서 여러 차례 의료사고 피해자분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아내가 요실금 수술을 받으러갔다가 식물인간이 된 남편도 있었고, 병원측의 잘못된 처방으로 머리카락을 포함해 온몸의 털이 빠져버리면서 삶이 망가져버린 여성분도 있었고, 그분들에 대한 병원측의 대응은 한마디로 횡포였기에, 아무래도 시민단체쪽 주장에 마음이 쏠립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회에서 결정됩니다. 다 그렇고 그런 이들이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그렇게 치워버리기엔 너무 많고도 중요한 결정들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어떤 게 가장 적절한 해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해법이 나오길 바라며 지켜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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