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채널을 자주 시청하지는 않지만, 채널을 돌리다가 잠깐 잠깐씩 상품 판매 내용을 볼 때가 있습니다. 보기에도 번듯한데다, 유명 상표까지 달린 제품인데 가격이 시중에 비해 너무 싼 경우가 많아서 혼자 의아해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단순히 '직거래'나 '박리다매' 효과겠지... 하면서 스스로 의문을 푼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얼마 전 이런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만한 제보를 접하게 됐습니다. 홈쇼핑을 상대로 거래하고 있는 중소기업 100여 곳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였는데, 그 결과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질문) 귀사의 브랜드가 아닌 유명 브랜드 부착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무려 절반이 넘는 중소기업이 이런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니...이거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문 결과를 받아본 직후 관련 피해를 당한 중소기업 섭외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홈쇼핑 업체와 거래를 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은 모두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한마디라도 이런 내용을 언급하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고, 결국 국내 모든 홈쇼핑 업체들과 거래가 끊긴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과거 홈쇼핑 업체와 거래했던 한 중소기업체 임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중소업체는 지난 2006년 당시 유행하던 컨벡션 전기오븐을 만들어서 홈쇼핑을 통해 판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체 브랜드 제품을 만든 뒤 홈쇼핑을 통해 소비자 인지도를 키워나갈 요량으로 의욕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홈쇼핑 업체는 중소기업 자체 브랜드로는 판매가 어려울 테니 다른 유명 브랜드를 갖고 들어오라고 권유했습니다. 말이 권유지 사실상 거절하기 어려운 강요였을 겁니다.
이 중소기업은 할 수 없이 당시 주부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있었던 한 주방기기 업체와 <컨벡션 전기오븐을 1대를 팔 때마다 5천 원을 주겠다>는 계약을 맺고 이 유명 업체의 상표를 샀습니다. 그러니까 제품의 기획과 설계, 디자인, 제조는 중소기업이 모두 하는데, 상표만 유명 업체 것을 부착한다는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라벨갈이'입니다. 이 중소기업은 이렇게 유명 상표를 붙이고 나서야 홈쇼핑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고,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3개 유명 홈쇼핑 채널에서 6천 대의 컨벡션 오븐을 팔았습니다.
보나마나 홈쇼핑 방송에서는 이 전기오븐을 설명하면서
"00 제품의 첨단 기술력이 돋보이는..."
"00 제품은 주부들 사이에서 이미 입소문이 나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같은 현란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면서 주부들의 관심을 끌었겠죠?
전자제품 뿐이 아니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여러 명의 중소기업 업체 관계자를 만나고, 전화통화를 했는데 의류나 운동화는 특히 이런 '라벨갈이'가 심했고, 심지어 화초까지도 상표를 바꿔서 납품하도록 요구 받은 중소기업체 사장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는 5개의 대형 홈쇼핑 업체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 홈쇼핑 업체가 생겼을 때만 해도 ‘케이블 TV로 물건을 팔아봤자 얼마나 팔겠나?’ 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지만, 이제는 1위 업체의 연간 매출 규모가 1조 원을 훨씬 능가할 정도가 됐고, 홈쇼핑 업체의 연간 매출 규모가 5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이제 홈쇼핑은 하나의 소비문화로 정착해가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신뢰와 사랑이 없었다면 이루기 어려운 성장이었겠죠?
이런 교묘한 '라벨갈이'는 이런 소비자의 신뢰와 사랑을 완전히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홈쇼핑 업체가 이런 문제에 대한 철저하고 근본적인 반성 없이, 유통과정에서의 일부 업체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로 치부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소비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