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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토사구팽' 논란

이현식

입력 : 2010.01.26 12:05|수정 : 2010.01.26 20:24

동서고금 다르지 않은 권력의 속성


서울에서 비행기로 13시간을 날아와야 하는 미국의 북동부. 이곳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들은 한국에서 많이 보던 것과 참 닮았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사냥이 끝나고 나면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이 고사성어는 한국의 정치를 다룬 기사에서 자주 보던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뉴욕에 와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주 후반 3일간 뉴욕증시가 폭락했다는 소식, 그 이면에는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진 민주당의 노선 '좌향좌' 논란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앞선 취재파일은 https://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00963) 민주당 진보파의 공격은  금융정책의 지휘자에게도 겨눠졌습니다. 미국의 중앙은행 총재라고 할 수 있는 벤 버냉키(Ben Bernanke) 연방준비제도의장이 공격의 표적이 된 겁니다.


 왜 중앙은행 총재가 표적이 됐나?

버냉키 의장은 , 말하자면 부시 정권의 사람입니다. 오바마가 뽑아 앉힌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미국의 중앙은행 총재 자리라는 것이 정치적 독립이 잘 지켜져 온 자리이고, 버냉키 또한 정치색이 없는 사람이다보니 문제가 된 적이 없을 뿐입니다. 게다가, 오바마는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의 금융 위기 속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벤 버냉키는 자연스럽게 오바마의 위기대응팀 주요 스탭이 되었습니다.

긴급히 나라 돈을 풀어 금융기관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bail out)함으로써 일단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 작업을 버냉키는 나름대로 잘 지휘해 왔고, 오바마의 신임도 얻었습니다.  오늘의 키워드인 '토사구팽'의 고사에 접목하자면, 사냥개로서 토끼사냥을 능숙히 해 낸 겁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그런데, 문제는 그 결과로 금융기관들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생겨났습니다.  금융기관들은 지난해 말부터 다시 돈을 잘 벌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서 싼 돈을 받고, 부실자산은 털어버리고, 사람도 많이 잘랐으니 수익이 남는 게 당연했겠지요. 그래서 이들은 보너스 잔치를 벌였습니다. 연말부터는 신규 채용도 다시 시작됐습니다.


일반 미국인들은 여기에 반감을 갖게 됐습니다. "아니, 우리는 여전히 실업률이 두 자릿수 수준이고, 은행 돈 빌리기가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인데다 , 자기들끼리 신났다고? 이거 뭣들 하자는 거야? 이러라고 당신들 뽑아준 줄 알아?" 


이런 정서가 무당파(=공화당/민주당 지지 성향이 분명치 않은) 백인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한 겁니다. 사실, 미국의 서민-중산층 유권자들로서는 충분히 이런 불만을 가질 만 합니다. 경제위기를 겪은 결과 금융의 시스템이라도 달라져서 앞으로는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현격히 낮아졌다면 또 모르겠는데, 시스템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전문가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은행은 따뜻해졌다는데 왜 우리는 계속 윗목이냐" ...서민들 반발 


아무튼 , 민주당내 진보파는 '월스트리트의 살찐 고양이들'만 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바마는 한 게 뭐 있냐"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사전에 희생양을 만들어 바리케이드를 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누구 목을 칠까...'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선거 때 자신들의 전우도 아니었던 사람이 여전히 중책을 붙들고 앉아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게 버냉키 입니다. 그다음은 불문가지입니다.


'옳지. 저 녀석의 목을 치자. 버냉키가 은행들한테 돈만 퍼다 주고 감독을 제대로 못해서 여전히 웃목에는 돈의 온기가 돌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런 생각을 보다 많은 민주당내 인사들이 하게 됐다는 게 중요합니다.

 "아직 금융시스템이 완전정상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금융공황 문제에 대해 월가에서도 가장 전문성을 인정받는 버냉키 후임은 누가 맡아야할 것인가?"등의 논의가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보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마침 버냉키는 이달 말로 4년 임기가 마무리됩니다. 상원에서 인준해주지 않으면 짐을 싸야 됩니다. 지난주 목요일 시점으로 보면, 민주당에서 "버냉키 인준 반대"를 공개선언한 민주당 의원은 4명이었습니다. 반면 , 야당인 공화당에서는 1명만이 인준반대를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버냉키를 쉽게 공격하지 못한 이유는, i)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어쨌든 자기네 정권 때 사람이기 때문에 . ii) 버냉키를 날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보다 좌파적인 사람이 들어설까봐 였던 것이라고 미국언론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분위기대로라면, 버냉키는 인준을 받지 못해 연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 소식은 전날 오바마 은행규제 발언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 증시에 또한번 어퍼컷을 날린 셈이 됐습니다. "버냉키는 나름대로 금융판의 실제 생리를 이해하는 전문가였는데, 포퓰리즘적인 이유로 그런 사람을 흔드는 것을 보니 증시에 돈을 오래 놔두면 안되겠다"는 판단을 투자가들이 하게 됐습니다. 

지난주 뉴욕증시의 3일연속 폭락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재인준은 되겠지만...상처입은 레임덕 

일단 주말사이 오바마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 의원들 설득에 적극 나섬으로써, 버냉키는 인준에 필요한 표 수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가 시작된 오늘, 뉴욕증시가 소폭 반등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미 버냉키는 상처입은 '레임 덕(lame duck)'이 됐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치적인 추진력이 예전같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버냉키의 금융정책팀이 해 온 일보다 앞으로의 일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까지는 불난 집에 일단 물을 부어 끄는 일 - 금융위기를 진정시키고 대형 기관의 도산을 막는 일-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는 피해복구와 재건입니다. 돈이 서민층까지, 경제의 모세혈관까지 다시 돌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경제의 경쟁력과 세계경제 시스템 자체가 그러기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버냉키는 앞으로도 칭찬받을 일 보다는 욕먹을 일이 더 많게 생겼습니다. 


 버냉키는 자기가 토사구팽의 위기에 몰리게 될 줄 몰랐을까요? 저는 아마 알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난세에 일단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장수를 필요로 하지만 , 급박한 상황을 넘기고 나면 공훈을 거둔 장수가 제거 대상이 되는 사례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 중국 한나라의 한신 등등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군에게 정치적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 아닌 다른 자를 제단에 올리고, 그 피로써 나의 권력을 연장해 가려는 사람들도 어느 권력의 주변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제가 버냉키의 팬이냐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정치 이야기가 경제를 흔드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