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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만 갖고 불을 끄라고?

안서현

입력 : 2010.01.21 13:30

이름만 "비상" 소화장치함


오늘은 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요즘같이 춥고 건조한 날씨에는 곳곳에 불이 많이 나죠. 

제가 당직근무를 서는 날마다 주택가, 야산, 학교 등등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 불난 곳을 취재하느라 밤을 꼴딱 새는 것만 봐도 겨울은 정말 불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이 났을 때, 가장 걱정 되는 곳이 고지대에 있는 주택가입니다.

흔히 달동네라 불리는 다가구 주택 밀집지역을 생각하시면 될텐데요, 그곳은 커다란 소방차량이 올라가기에 너무나도 힘든 장소입니다.

올라가는 길이 좁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주차된 차량 때문에 소방차 한 대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습니다. 집은 불에 타고 있는데, 소방차량은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서 쩔쩔 매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주택가 고지대에는 '비상소화장치함'이란 것을 설치해 둡니다.

일반적으로 아파트에 소화기를 비치해 두는 것과 달리, 고지대 주택가의 비상소화장치함 안에는 기다란 소방호스가 있어 주민들 스스로도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에 1차적인 화재진화를 어느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 은평구 수색동의 42살 김모씨는 지난 주 수요일,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지난 13일 저녁 7시쯤.

옆집 옥탑방에서 불이 나자, 평소 비상소화장치함을 눈여겨 보고 있던 김씨는 서둘러 비상열쇠함을 부수고 장치함을 열었습니다.

안에는 소방호스가 2개나 준비돼 있었습니다. 소방호스를 꺼내든 김씨.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소방호스를 연결할 밸브나 소화전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달랑 호스만 들어있었던 겁니다.

장치함 문에 붙은 안내문을 살펴봐도 소화전의 위치는 전혀 표시돼 있지 않았습니다.

어두컴컴한 저녁 시간.

설상가상으로 장치함 안에 있던 손전등도 켜지지 않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소화기를 꺼내든 순간, 뒤늦게 소방차량이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불은 이미 번진 뒤였죠.

김씨가 도착한 소방대원들에게 소화전이나 밸브가 왜 없냐고 따져 묻자, 대원 중 하나가 소화전의 위치를 가르쳐 줍니다.

소화전 30미터 뒤.

빛바랜 노란 페인트로 희미하게 표시된 맨홀 하나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지가 아니기 때문에 밤에는 (낮에도) 결코 보이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다행히 옥탑방에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아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김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취재에 들어갔습니다.

 현장을 가보니 '소화전'이라고 적힌 맨홀 뚜껑은 정말 비상소화장치함에서 30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그 위치를 안내해주는 글이나 그림은 장치함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 주변에 맨홀 뚜껑이 여러개나 있어 어떤 게 소화전이고, 어떤 게 하수구인지 동네 사람들조차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소방서에서는 1년에 1-2번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방훈련을 실시한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장치함이 설치된 동네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훈련을 받아본 사람이 거의 없단 말이죠.

다른 장치함은 어떨까요. 

제가 찾아간 신당동의 한 비상소화장치함은 장치함 문 앞에 눈이 1/3가량 쌓여 있고, 쓰레기봉투 수십개가 버려져 있어 문을 전혀 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당 소방서에 전화를 걸자, 주민들이 눈을 치워 거기에다 둔거고, 쓰레기도 주민들이 버린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수색동의 다른 장치함의 경우에는 소화전이 장치함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위에 눈이 까맣게 얼어붙어 있어 맨홀뚜껑인지 아스팔트 도로인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상소화장치함들은 소화전이 장치함 안에 설치 돼 있지 않고 바깥에 따로 분리돼 설치된 '일반형(분리형)' 소화전입니다. 장치함 안에 내장된 비상소화장치함들도 있는데 이것은 '일체형(내장형)'이라고 불립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장치함들은 5천여개가 있고, 서울시에는 그 절반인 2577개가 있습니다. 

분리형과 내장형의 비율은 5:5 정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는 4-5년 전부터 분리형을 내장형으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예산이 넉넉치 않아 1년에 30개 정도밖에 바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상급기관인 소방방재청은 아예 이런 계획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울시는 지자체 차원에서 소방방재청 예산이 아닌 자체 예산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죠.

왜 처음부터 내장형을 만들지 않았냐구요?

내장형이 생긴건 4-5년 전부터 입니다. 그 전에 80년대부터 만들어진 비상소화장치함들은 전부 분리형이죠.

그런데 이 분리형이 문제가 많고, 불편하자 내장형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내장형은 설치비가 분리형보다 많이 든다고 합니다.

상수도 관을 장치함까지 끌어와야 하고, 이 둘 사이 거리가 멀 경우에 돈이 더 많이 들게 됩니다. 그래도 이렇게 교체할 바에야, (인력낭비에, 돈은 오히려 두배로..) 위급한 상황에 철저하고 안전하게 대비하기 위해 처음부터 전부 내장형으로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임시방편'식의 행동은 언제나 문제를 유발하기 마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