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길목에 들어선 한.일관계가 한풍(寒風)과 훈풍(薰風)이 뒤엉킨 복잡미묘한 기류에 휩싸이고 있다.
일본 정부가 25일 오전 발표한 고등학교 교과서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가 그 진원지다. 해설서의 독도 표기를 둘러싼 양국 정부의 대응기조와 수위는 한.일관계의 변화된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통상 독도 이슈만 터지면 '강(强) 대 강(强)'으로 충돌하던 과거와는 달리 한.일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 서로 대결의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저강도' 대응으로 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게 소식통들의 관측이다.
우선 일본 정부는 장고 끝에 한.일관계와 일본 국내여론을 동시 고려한 '절충카드'를 꺼내들었다. '독도'라는 표현을 제외함으로써 모처럼 해빙무드를 타는 한·일관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동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우익강경론이 득세하는 국내여론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러자 우리 정부 역시 국민정서와 한·일관계를 동시 감안하며 차분한 대응기조를 꾀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엄중한 기조로 항의하면서도 강도와 수위를 조절함으로써 한.일관계를 배려하려는 흔적이 읽혀진다.
지난해 7월 중등교과서 해설서 파동때 ▲외교부 항의성명 ▲주한 일본대사 초치·항의 ▲주일 한국대사 일시귀국 조치로 이어지는 초강경 대응에 나섰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는 선에 그쳤다.
양국의 이 같은 대응스탠스는 앞으로 한.일관계 기상도를 일정정도 예고해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도와 과거사 현안을 고리로 긴장을 조장하기 보다는 가급적 갈등을 억제·관리하는 쪽으로 양국이 대응좌표가 설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정권의 외교정책 기조와 대외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아시아 중시외교를 표방한 하토야마 정권으로서는 오랜 세월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해온 독도를 또다시 분쟁지역으로 몰고 갈 경우 주변국의 경계심을 자극시키고 이는 일본의 역내 이니셔티브를 약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특히 후텐마 기지이전 문제로 미국과 최악의 관계에 직면한 일본으로서는 자칫 외교적 고립에 처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소식통은 "일본이 독도문제로 한국의 뒤통수를 칠 경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첫단추도 꿰지 못한 채 사산(死産)되고 일.중간 신협력체제도 추진전망이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로서는 이미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분쟁화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점에서 차분한 대응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 독도 문제를 놓고 정면 충돌한 후유증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정부의 대응 방향은 가급적 이런 기조를 보일 것이라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일본 우익강경파들의 노림수가 독도의 국제분쟁지역화라는 점에서 연례행사처럼 터지는 독도 현안에 대해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부 내부의 견해가 적지 않다.
외교부 문태영 대변인이 이날 논평을 통해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어떤 주장을 하든지 관계 없이 한.일 간에 어떠한 (영토)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힌 것도 이를 염두에 둔 언급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양국은 독도문제에 대해 당분간 '현상유지' 정책을 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게 외교소식통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독도문제는 돌발변수가 늘 잠재한 이슈라는 점에서 상황을 예단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일단 하토야마 정권이 처한 국내 정치환경이 거론되고 있다. 그렇찮아도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것으로 평가되는 하토야마 정권으로서는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내 강경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시각이 나온다.
특히 하토야마 정권은 올해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펴낸 정책공약집에서 "영토주권을 가진 독도"라는 표현을 꺾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선거를 앞두고 독도를 둘러싼 돌출현안이 부상할 경우 하토야마 정권으로서는 국내여론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할 개연성이 있고 이 경우 우리 정부로서는 강경대응은 외길수순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여론의 흐름도 매우 중요한 변수다.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한국 할머니와 유족들에게 청구자 1인당 고작 99엔을 지급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온 이후 대일여론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내년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라는 점도 양국 사회에 내재된 '감정들'을 자극해 양국간 긴장지수를 높이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독도 이외의 과거사 현안들이 의외의 복병으로 터져나올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경우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했던 일왕 방한은 거론되기 조차 어려운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따라 내년 한일관계는 독도문제를 뇌관으로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일종의 휴화산 형국이라는 외교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지금 현해탄은 얼린 듯 풀린 듯한 살얼음판"이라는 한 정부 소식통의 언급은 한.일관계의 현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관측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