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핀란드 사로잡은 발레리나 하은지, 핀란드국립발레단 주역으로 활약
"낯선 곳에서 외롭지 않으냐구요? 무대에서 춤추는 게 너무 행복해 외로울 틈도 없어요."
북유럽의 강소국(强小國) 핀란드는 유럽에서도 발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헬싱키에 자리 잡은 핀란드 국립오페라극장에는 1년 내내 다채로운 발레 작품이 오르고, 객석은 늘 발레 애호가들로 가득 들어찬다.
발레가 자연스레 일상으로 자리 잡은 풍토에 힘입어 유럽의 일류 발레단으로 도약하고 있는 핀란드 국립발레단(FNB)에서 최근 한 동양인 발레리나가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주인공은 FNB의 유일한 한국인 무용수인 하은지(25) 씨다.
2007년 10월 핀란드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탄력 넘치는 춤, 풍부한 표정으로 현지 관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입단 1년 만에 발레단의 주역을 꿰찬 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 바야데르', '작은 죽음' 등 고전과 현대를 망라한 20여 편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는 오는 17일, 19일에는 연말 공연인 '호두까기 인형'의 여주인공 클라라로 나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유니버설발레단을 거쳐 핀란드에 진출한 그는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곳에서 여러 작품의 주역을 소화하며 한 뼘 더 성장한 것을 느낀다"며 "관객들의 반응도 좋고, 알아보는 팬도 생겨 보람을 느낀다"고 근황을 전했다.
하은지가 핀란드에 둥지를 튼 계기는 2007년 여름에 열린 뉴욕국제발레콩쿠르였다.
8년 동안 금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던 이 콩쿠르에서 당당히 금상을 거머쥔 하은지를 둘러싸고 네덜란드국립발레단과 FNB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졌다.
콩쿠르 직후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도 오디션 제의를 해왔으나,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 일정상 응할 수가 없었고, 결국 주역 기회가 더 많이 보장되는 핀란드행을 결정했다.
"20대 중반의 나이는 무용수로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잖아요. 레퍼토리도 다양하고, 주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아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당초 1년만 FNB에 몸담으려 했지만, ABT 무용수 출신인 케네스 그레이브가 2008년 말 새 단장으로 부임하며 하은지를 붙잡았다.
하은지는 그레이브의 총애 속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 '볼룬터리스(Voluntaries)' 등 굵직한 작품의 주역으로 발탁됐고, 현지 언론은 자연스럽고, 유연한 몸짓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선보이는 동양의 발레리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지 최대 일간 헬싱인 사노마트(Helsingin sanomat)는 '볼룬터리스'의 주역을 훌륭히 해낸 하은지를 두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함을 겸비한 무용수", "다른 솔리스트보다 모든 면에서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핀란드에서 발행되는 스웨덴어 신문인 HBL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주인공 오로라를 맡은 그에게 "어려운 기교를 잘 소화하고, 음악과 하나가 돼 춤추는 매력적인 오로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FNB가 오랜만의 해외 공연으로 올해 1월 마카오에서 선보인 '갈매기'의 주역을 맡은 그에게 발레 잡지 인 발레매거진은 "가장 도드라지는 춤을 추는 무용수"라는 평가도 내렸다.
그의 성과는 큰 부상을 이겨내고 일궈낸 것이라 더 값지다.
한예종 재학 시절인 2004년 미국 네바다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진 그는 현지에서 수술을 받은 뒤 9개월 동안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발레리나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수술을 했지만,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걱정이 없었어요. '앞으로 무용을 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는 한 번도 안 했던 것 같아요. 제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기도 하고요."
장신의 발레리나가 즐비한 FNB에서 그는 무용수로는 비교적 작은 163㎝의 키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핸디캡으로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물론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좋았겠지만, 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다행히 선천적으로 유연성을 타고난 덕분에 무대에서는 실제보다 길어 보인데요. 또, 유럽에서 작은 발레리나를 선호하는 것도 저에게는 다행스럽죠."
어릴 때부터 그를 가르친 김혜식 전 한예종 무용원장은 하은지에 대해 "유연하면 힘이 없고, 점프도 잘 못하기 마련인데, 힘과 유연성을 겸비했다"고 말한다.
김 전 원장은 "어떤 무용수보다도 탄력 있는 춤을 추는 게 은지의 장점"이라며 "자연스럽게, 힘들이지 않고 춤을 춰 무대에서 더 돋보인다"고 귀띔했다.
하은지가 핀란드 활동 기간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표현력이 좋아진 것이다.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 역할에 빠져드는 편이에요. 표현력이 비교적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다른 무용수들을 보니 제가 부족한 게 보이더라고요. 상체와 팔 동작에 신경을 많이 쓰고, 표정에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표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항상 노력해요."
그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한국 무용수 가운데서는 김지영, 김주원(이상 국립발레단) 선배를 좋아해요.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따라 하거나, 닮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만의 색깔을 띤 춤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일본인 무용수는 몇 명 있지만, 한국인으로는 FNB의 유일한 단원인 그는 "소화해야 할 작품이 워낙 많고, 연습량도 만만치 않아 외로울 틈도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저는 원래 무대에 설 때가 가장 행복해요. 앞으로 더 큰 발레단으로 옮길 생각도 하고 있지만, 원 없이 무대에 설 수 있는 핀란드에서의 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싶어요."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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