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스나리君.
요즘 일본에서는 '예산'이란 말이 연일 화제입니다.
내년도 국가 살림살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 국민들이 내는 세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예산 편성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내년도 예산 규모가 95조엔,천 조 원을 넘습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예산 편성 작업은 주요 국가 정책을 담당하는 담당 부서에서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재무성에 내년도에는 무슨 사업을 하는데 얼마가 필요하다고 요청을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재무성이 각 부서의 의견을 참고해서 정부의 예산안을 짭니다.
그리고 정부 예산안을 국회로 보냅니다.
국회에서는 정부가 보내온 예산안이 타당한지,이 예산을 꼭 집행해야 하는지, 낭비의 요소는 없는지,예산 사용의 우선 순위가 뒤바뀐 것은 없는지 등을 심의해서 최종적으로 내년도 예산을 결정합니다.
원론적으로는 그런데요,사실 일본의 경우에는 야스나리군이 잘 알고 있듯이 자민당 집권 시에는 정부가 예산 편성을 할 때부터 자민당 실세들과 상의해서 예산을 편성해왔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선거에 도움이 되는 사업에 예산을 배정받는 것이고 예산을 담당하는 관료들로서는 정치인들의 얼굴을 세워주는 대신 국회에서 예산 통과를 보장받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산 담당 부서는,예전의 대장성 말입니다,예산 편성권을 무기로 내세워서 다른 부서는 물론 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단체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식으로 정치인과 관료들이 예산 편성에서 한통속이 되는 것, 이것을 예산 편성의 정관유착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산은 규모도 방대하고 쓰임새도 워낙 다양할 뿐이라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산은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짜여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아마 다른 나라들도 크게 예외는 아닐 겁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그런 경향이 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9월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시행돼온 예산 편성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선 지역구 의원들의 민원 등으로 인해 불요불급한 사업에 들어가는 돈이 많고 불필요한 사업으로 낭비되는 국민들의 세금이 한 두푼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겠지요.
무엇보다 관료들과 몇몇의원들이 밀실에서 예산을 주무르는 것,즉 예산 편성의 정관 유착 관행은 옳지 않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예산 편성 관련 청문회입니다.
일본말을 직역하면 예산 절감 작업 정도일 텐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예산 편성 청문회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야스나리군은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청문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선 청문회는 각 부처가 내년도에 시행하겠다고 밝힌 국책사업과 그 예산에 대해 심의를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시행된 이 청문회에서는 449개 국책 사업에 대해 심의가 벌어졌습니다.
청문회가 열린 장소가 국회가 아니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 실내 체육관이었다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예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와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또 청문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했습니다.
밀실 담합 논의가 있었던 예산 편성 관련 논의를 말 그대로 탁 트인 광장에서 벌인 것입니다.
청문회라면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번 청문회에는 민간인 전문가 60명이 청문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의원과 관료들이 주무르던 예산 편성 작업에 이제 국민들도 참여해서 감시하도록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청문회 방식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해당 부처 담당자들이 자신들이 내년도에 시행하겠다고 밝힌 사업의 개요와 필요성, 그리고 그 사업에 얼마만큼의 예산이 들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설명이 끝나면 민간위원을 비롯한 청문위원들이 그 사업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꼭 그 사업이 필요한지,안하면 안되는지,예산 낭비 요소는 없는지 등등.
그에 대해 담당 공무원들이 답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청문위원들이 결정을 합니다.선택지는 세 가지입니다.
사업을 할 필요 없으니 폐지해라,내용이 부실하니 고쳐라, 원안대로 해라.
결정 방식은 청문위원들의 다수결로 정합니다.
사업 설명에서 최종 결정까지 모든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신속하고 명쾌합니다.
물론 복잡한 국가 정책에 대해,적게는 수억엔에서 수백,수천억엔이 들어가는 사업을 두고 불과 한 시간 논의를 해서 폐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식으로 그것도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없지 않습니다만 일본 국민들은 한 시간의 공개 심의 끝에 공개적으로 '폐지' '수정' '원안 시행'으로 결론이 나는 것을 보고 통쾌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끼는 듯합니다.
언론의 보도 태도도 그렇고 말이지요.
11월 13일부터 전후반기로 나뉘어서 이 청문회는 9일동안 진행됐습니다.
심의 대상이 된 449개 사업 가운데 60개 사업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각 부처가 신청한 예산 가운데 1조 7억엔의 예산이 삭감됐습니다.
물론 민주당의 정치쇼라는 말도 없지 않습니다.
예산 심의는 국민들의 대표가 모이는 국회의 고유 권한입니다.
따라서 정부 공무원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닌 사람들이 국책 사업을 폐지하라 마라, 여기에 돈을 써라 쓰지 마라라는 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번 청문회는 엄격히 말하면 법적인 강제력을 갖는 청문회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청문회에서 폐지하라고 결정을 내린 60개 사업이 꼭 폐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의 최종 예산 편성과 국회 심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정치적으로 폐지 결정이 내려진 만큼 그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불과 한 시간이라는 논의 시간을 정해놓고 그것도 다수결 방식으로 정책의 채택 여부를 가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그리고 그 방식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더 필요할 거 같습니다.
다수가 모이는 공개 논의의 장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하기 일쑤입니다.
예산 절감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 이 사업에 한 푼이라도 더 써라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깎아라라고 말하는 사람의 의견이 힘을 얻기 마련입니다.
청문위원들은 깎아라,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기대하는 군중들의 말없는 그러나 강력한 요구에 따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산이 깎인 과학 분야 등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의 항의 성명인데요, 노벨 화학상을 받은 노요리 료유지씨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과학 연구 예산을 삭감하기로 한 사람들은 앞으로 과연 역사의 법정에 설 각오가 돼있느냐"고요.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보면 청문회는 대성공입니다.
국민들의 70%가 이 청문회가 바람직했다고 평가했습니다.
9일 동안의 청문회 기간 동안 청문회장을 직접 다녀간 사람이 2만명이 넘고 인터넷에서는 이 소식이 연일 화제였습니다.
방송을 비롯한 모든 언론들은 이 소식을 주요 뉴스로 취급했습니다.
청문회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는 스타로 떠오른 사람도 생겼습니다.
이번 청문회는 예산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궁금증, 갈증을 풀어준 셈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내가 내는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싶었던 겁니다.
피 같은 내 돈이 낭비되는 것은 아닌지 늘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세금으로 나가는 돈은 많은데 도대체 국가로부터 내가 받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지내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일본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정치는 내 일 아니다,그것은 정치가들이 할 일이다, 나랏일은 공무원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일이다,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라는 식의 사고 방식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 번 중의원 총선거 때도 그렇고요,이번 예산 청문회도 그렇습니다만 일본 국민들도 사실은 자신의 일상 삶은 물론이고 일반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지 않은 거 같습니다.
다만 그런 관심을 표시하지 않도록 알게모르게 교육되어진 것은 아닐까요? "아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자네는 자네 일만 해.그러면 돼" 이렇게 말이지요.
야스나리군.
혹시 君도 그런 식으로 알게모르게 교육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번 청문회의 교훈은 딱 하납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용된다! 그리고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