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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2012 - 시각적 과식의 강요

남상석

입력 : 2009.11.15 11:42|수정 : 2009.11.16 14:00

2012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12세 관람가)


남상석의 영화이야기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투모로우]같은 작품으로 유명한 할리우드가 보증하는 흥행 감독입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좀 미흡하지만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은 그의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했는데 이번에도 정말 유감없이 엄청난 돈을 퍼부어댄 영화를 자랑스럽게 내놓았습니다.

2009년, 지질학자 헴슬리(치웨델 에지오프)는 2012년쯤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G8쯤 되는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지구인들과 동식물들을 피난시킬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고 2012년이 되자 세계 전역에서 지진, 해일 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별 볼일 없는 작품만 쓰면서도 일에 미쳐 이혼당한 작가 잭슨(존 쿠색)은 정부 계획을 우연한 기회에 알아채고 가족들과 아내의 현 남편까지 데리고 놀이공원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짜릿한 일들이 연속으로 펼쳐지는 피난길에 오릅니다.

시나리오에 '천만 대군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라고 한 줄 쓰기는 쉽지만 그걸 영상에 담아낸다고 할 때는 엄청난 돈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건데, 이 영화는 감독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그걸 그대로 죄다 영상으로 담았을 만큼 원 없는 특수효과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초반 LA지진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쥐며 볼 수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심신이 피곤해지더군요. 시각적 충격에도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화면의 스케일에 비해 영화를 끌고나가는 드라마 구조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지질학자 헴슬리와 작가 잭슨의 두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택하는 고전적인 장치인 붕괴된 가족의 재결합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요. 몇몇 장면의 유머는 재미있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급박한 탈출 장면에 등장하는 명차 ‘벤틀리’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네요.)

잭슨과 그 가족이 탈출선까지 가는 여정은 로또에 수십 번 당첨되고도 남을 만큼 행운의 연속이 이어집니다. 주인공에 감정이입되어 위기때 주인공의 편에 서서 응원해주고 살아남으면 박수를 쳐야 할 텐데 마지막 탈출선 잠입 부분에서는 주인공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더군요. 자기네 가족 살자고 수만 명이 탑승한 탈출선을 위험에 빠뜨리거든요. 잭슨 가족에게 호의를 보여준 중국인 용접공 가족의 운명도 그렇고요.

아주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지질학자 헴슬리도 잭슨 가족만큼은 아니지만 탈출선도 타고 연인도 생길 정도로 운이 좋습니다. 홀로 깨어있어 무지한 중생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는 초반에는 좀 매력적이더니 후반부로 갈수록 한심해집니다.

탈출선에 탑승할 즈음부터 장관에게 늘어놓는 설교는 취지에는 적극 공감하나 듣기에 매우 지루한 교장선생님 훈시처럼 들리더군요. 오히려 그를 질책하며 반대 논리를 펴는 장관의 말이 훨씬 설득력을 갖췄습니다.

헴슬리의 친구인 인도인 과학자 가족을 비롯해 세계 각 대륙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수십억명인데 각 상황마다 적용하는 기준이 들쭉날쭉해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끝까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까지 죽어나가는 과감함도 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절대 깨지지 않는 법칙인 '개는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공식은 여기서도 적용됩니다.(현실에서 재난을 닥쳐올때 개나 고양이를 품에 꼭 안고 있으면 살아남을까요?)

평범한 시민들 모르게 대피계획을 짜고, 일종의 민자유치사업 방식으로 10억 유로라는 거금을 내는 사람에게 멸망하는 지구를 탈출할 티켓을 준다는 등의 설정은 썩 괜찮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멸망의 원인이나 그에 대한 예측 등 꼼꼼히 따져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도 많이 발견되고 허술한 드라마 구조 때문에 시각적 쾌감에 뒤따르는 인간적인 감동은 없습니다.

드라마가 허술하면 과감히 줄이던가요. 장강의 물결처럼 액션장면 앞뒤로 장황하게 전개됩니다. 물량으로 때려부으면 드라마는 좀 허술해도 흥행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 밀어붙이는 방식에 대해 이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우리도 하루빨리 들여와 배워야 한다는 선각자들이 많이 나올까봐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