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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금가루로 50억! 티끌모아 태산?

최고운

입력 : 2009.10.07 17:10|수정 : 2009.10.07 17:10


(요즘 취재파일 안쓴다고 질책하시는 분들이 계서서^^ 부족한 글솜씨지만 오늘은 두개 쓰렵니다)

중학생 시절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서부 영화의 배경인 '골드 러쉬' 때 금광 주변 술집 종업원들이 술값으로 금가루를 받은 뒤 자연스레 턱수염을 매만졌다가 나중에 수염에 달라붙은 사금들을 털어내 되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워낙 입담이 좋은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지루한 세계사 부분을 재미있게 설명하려나 보다 하고 그냥 넘겼었는데요. 지난주 제가 취재했던 '반도체 금도둑'들이 딱 그 얘기였습니다.

반도체나 컴퓨터 등에 금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아마 많이들 알고 계실겁니다. 얼마 전에 휴대폰 칩에서 금 뽑아내는 장면을 담은 프로그램 방영 이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금 녹이는 물'이 1위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차장님 51살 김 모 씨와 사원 40살 이 모 씨는 청주에 있는 한 반도체용 인쇄회로기판 제조 업체에 근무했습니다.

부피가 큰 전선 대신에 금속들로 전기가 통하는 길을 만들어 스위치나 각종 소자,집적 회로 등을 접합해 회로 등을 구성하는 게 PCB 즉 인쇄회로기판인데요. 이 기판을 만들 때는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도금-세척-세척-도금-세척-세척-세척-건조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금을 사용하는 것은 금이 워낙 전도율이 좋기 때문인데요. (참고로 저는 전형적인 문과생입니다. 물리, 화학 이런거 잘 몰라요 ㅠ 제가 취재한 게 혹시 현업과 판이하게 차이나면, 지적 많이 해주세요. 이해하는데 한참 걸려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전선 역할을 하는 부분에 금을 입힌 뒤 필요 없는 부분에 붙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금들은 세척을 통해 떼어냅니다. 기판을 많이 많이 생산하다보면 떨어져 나간 금들도 많겠죠? 그래서 이 회사는 세척 수조에 필터처럼 생긴 전해망을 넣어 금을 수거했는데요, 김 씨 등은  바로 이 과정에서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회사는 어차피 월말에 한 번 금을 수거해 가는데다 매월 수거되는 금의 양이 정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구입한 망을 넣어 금을 빼돌려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김 씨 등은 재빨리 청계천에서 공기청정기 필터를 구입했습니다.

왜 전해망을 안사고 공기청정기 필터를 샀냐고요?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회사에서 사용하는 전해망을 개인적으로 구입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청정기 필터가 전해망과 모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자, 필터까지 구입해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금을 빼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한달에 금을 빼돌린 기간은 딱 5일. 이 씨 일당은 회사에서 금을 수거해 가고 난 뒤인 매달 1일에서 5일까지만 회사의 전해망 대신 자신들이 구입해 온 필터를 넣었습니다. 6일부터 말일까지는 다시 회사의 전해망을 끼워서 의심을 피했고요, 자신들이 수거한 금은 장물업자를 통해 폐금처리 업체에서 금덩어리로 만든 뒤 금은방에 팔아 현금화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팔 때 이들은 얼마를 벌었을까요?

놀랍게도 한 번 수거할 때마다 나온 양은 금괴 3덩어리 정도.

한 덩어리에 요즘 시가로 4천만 원 정도 하니까 딱 한 달에 한 번 고생하면 1억2천이 수중에 떨어진 겁니다. 어마어마하죠. 사원 이 씨의 연봉이 3천만원이었다고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의 수고로움으로 순식간에 연봉 3배를 벌어들이니 당연히 그만 둘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이들은 3년 남짓한 기간동안 무려 120KG, 50억 원 어치의 금을 훔쳤습니다.

돈은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동원해 12개 계좌로 분산했고, 외제차와 1백 평이 넘는 호화주택을 구입해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라, 장물업자가 금을 한 번 팔아줄 때마다 지불해야하는 1천만 원~2천만 원의 수수료가 아까워잔 이들은 직접 금을 녹여 팔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역시 과유불급.

이들이 팔겠다며 꺼낸 금덩어리의 모양이 울퉁불퉁 조잡한 것을 수상히 여긴 금은방 주인의 눈썰미에 결국 꼬리가 잡혀 쇠고랑 신세는 물론, 회사로부터 그간 훔친 금액만큼 토해내라는 소송까지 당했는데요. (혹시 남의 금붙이 훔쳐서 금은방에 파시는 분들. 이제 그만 하세요. 금은방에 형님들과 친분이 두터운 주인분들 많이 계십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몸소 실천했다고 봐도 부족함이 없는 이번 사건. 역시 도둑질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참고로, 이렇게 금을 빼돌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유명한 반도체 회사들도 당할 수 밖에 없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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