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의 탄생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그래도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며 뻐기던 자칭 국가 엘리트 브레인(?)들은 민심을 달래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내 놓았습니다. 시민들의 피부에 직접 와닿는 통금 해제 같은 조치와 더불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컬러 TV 방송,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 입니다.
야구는 축구와 더불어 시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스포츠였고 프로야구 출범 이전에 주인공은 고교 야구였습니다. 무슨 무슨 기 결승전이라도 열리는 날 중계방송을 보면 재학생들과 졸업한 동문들이 한데 어울려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고교야구는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게 됐고 야구팬들은 고교야구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세련되고 노련한 플레이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고향팀을 응원하는 지역색이 절묘하게 배합되면서 아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에이스 선수가 트레이드 등을 통해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라도 하면 마치 '고향'이라는 부모를 버린 배신자 내지는 패륜아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받는 기현상까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또래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구단의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해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을 내고 모자 점퍼등을 선물로 받아 입고 다니면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자랑하느라 바빴고,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에서는 야구를 하는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당시 대전에 연고들 두었던 OB 베어스를 응원했고, 또 원년 우승까지 하는 바람에 한껏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야구 물을 먹고 온 박철순의 연승 행진, 뚱뚱한 몸이지만 환상적인 유연성을 가진 허리로 맹타를 휘둘렀던 윤동균, 구렛나루가 인상적이었던 홈런 타자 김우열, 큰 키로 공을 받을때 체조 선수처럼 다리를 쭉 뻗어 잡던 1루수 신경식 등 ...
그랬던 OB가 몇년 후 연고지 대전을 버리고 서울로 옮겨가 버리는 바람에 충청권 남녀노소 야구팬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준 바 있습니다. 그 뒤로 저는 프로 야구에 시들해졌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은 당시 형편없는 승률로 상대방 팀의 기록 향상에 많은 기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팀의 투수였던 감사용 선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속 가족 관계나 경기 기록 등은 살짝 변형을 가했지만 큰 틀은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고 제작진은 밝힙니다.
원년에는 꼴찌로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가끔 강팀을 꺾기도 하고 또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활약하던 '너구리' 투수 장명부를 영입해 정규 리그 2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런 삼미 팀에게는 '도깨비 팀'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삼미 특수강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 감사용은 취미로 직장 야구를 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야구 선수, 그의 방 천장에는 메이저리그 스타의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삼미 수퍼스타즈의 투수 공개 모집 공고는 눈에 확 띄는 사건이었고 회사를 땡땡이치며 공개 모집에 지원을 합니다. 국가대표 선수 출신도 하나 없고 출범 전부터 최약체로 꼽히던 삼미에서 결국 왼손 투수가 없다는 이유로 발탁이 되고,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가족들에게는 박철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처럼 허풍을 떨며 자랑하지만 그는 점점 초라해지고 불안해집니다. 패전 처리 투수로 마운드에 서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패전 처리로 등판하면 관중들은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방송국은 중계방송을 끊습니다.
직구 최고 속도가 120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투수에게는 그런 역할도 감지덕지 해야할 처지입니다. 팀 성적도 형편없어서 연전 연패에다 최다 실점등 안 좋은 기록들만 만들어내다 보니 경기가 끝난 뒤 흥분한 팬들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는 소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에게 드디어 선발 출장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상대는 20연승의 신화에 도전하는 OB 베어스의 박철순 투수. 감사용은 결의를 다지고 마운드에 오르고 경기는 삼미 선수들의 불꽃같은 투혼으로 예상을 뒤엎고 팽팽하게 진행됩니다. 투수 감사용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1승을 올릴 수 있을까요...
적절한 캐스팅과 조화로운 연기
야구를 다룬 영화의 가장 핵심은 경기 장면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몇가지 새로운 시도로 만족할 만한 수준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역을 맡은 이범수를 비롯한 배우들이 몇 달에 걸친 연습을 통해 야구를 배워 대역을 쓰지 않고 연기해 리얼리티를 더해줍니다. 오른손잡이인 이범수는 왼손 투수의 투구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힘든 노력을 들였다고 합니다.
경기 장면을 잡는 카메라는 우리 눈에 익숙한 텔레비젼 중계 카메라의 위치가 아니라 직접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잡아 새로운 박진감과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바짝 잡은 선수의 표정과 발걸음, 공이 날아가는 모습 등을 슬로우 화면과 적절하게 배합하며 실제 경기보다 더한 긴박감을 느끼게 합니다.
주인공 이범수와 '얼굴만 메이저리그'인 포수 금광옥 역을 맡은 개그맨 출신 이혁재, 박철순 투수 역을 맡은 공유 등 조연들 뿐 아니라 중계방송 해설자등의 캐스팅도 적절하고 맛깔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후반 클라이막스에 맞대결을 펼치는 장면에서 공유는 별다른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긴장감을 잘 표현해 냅니다. 아무리 야구 천재라고 하더라도 쉬운 게임이라고 해서 그냥 건성으로 공을 던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진정한 프로 선수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주인공 어머니 역의 김수미 씨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들의 평범한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십년 쌓인 연기 노하우는 마치 일상 생활의 그 모습 그대로처럼 꾸미지 않는 대화로 '위대한 자연스러움'이라는 자산을 풀어내 보여줍니다. (시사회 인사말에서 김수미 씨는 "이 영화가 떠야 됩니다. 그래야 제가 다음 영화에 출연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영화에 대한 의욕을 나타내더군요.)
다만 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중간 부분의 에피소드들 가운데 몇몇은 사족처럼 영화의 진행과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당시 선수들의 유니폼과 장비 뿐 아니라 생활주변의 소품들까지 꼼꼼하게 챙긴 흔적에서 수고를 느낄 수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등장하는 최루탄과 전경 장면과, 경기장의 관중들 부분에서는 스펙터클한 맛도 조금 미흡하다는 느낌입니다.
꿈을 담아 던진 투수 감사용
특출난 재능은 갖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좌절을 겪던 주인공이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 승리를 일구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의 공식입니다. 하지만 [슈퍼스타 감사용]은 꼴찌 팀의 꼴찌 투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런 공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존의 공식을 차용한 영화들은 자칫하면 관객들이 "그래 너 잘났다." 해버리고 마는 우를 범할 수 있는데, 이 영화가 취한 방식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가슴 찡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미덕을 가져다 줍니다.
잔잔하지만 코끝 찡한 감동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릴때부터 누구나 1등, 금메달, 우승을 꿈꾸기를 강요 당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고, 조금 시도해보다가 주저앉기도 하고, 또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목표는 이뤄지지 않고, 승리의 환호는 경쟁자의 몫이 되기도 합니다. 좌절을 현명하게 극복하기도 하지만 합리화나 도피를 더 많이 하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드라마에는 달콤하고 짜릿한 승리의 기쁨보다는 쓰고 매운 좌절과 실패가 더 많이 등장합니다. 목표와 결과에만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서 항상 스쳐지나가기 쉬운 '아름다운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에 대한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코끝 찡한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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