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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시효의 덫'…징용피해자의 한맺힌 소송

입력 : 2009.08.12 10:28

한·일 법원서 '줄패소'…대법 선고만 남아


8월15일 광복절이면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4년이 지나지만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채 한 맺힌 송사를 이어가고 있다.

짐승 같은 대우 속에 뼈 빠지게 일하며 젊음을 다 날렸지만 '한일 청구권협정'과 '소멸시효'라는 벽에 막혀 억울하게 희생된 청춘을 배상받을 길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게 된 피해자들에겐 8.15 광복절이 아직도 진정한 광복절로 느껴지지 않는다.

◇ 죽도록 일 했건만… = 여운택 할아버지(86)는 스무살이던 1943년 평양 시내에서 일본제철이 내건 채용 공고를 봤다.

오사카 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공 생활을 하면 돈을 받으며 기술도 배우고 조선으로 돌아와 제철소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 할아버지 등 많은 청년들이 부관(釜關)연락선에 몸을 실었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혹독한 강제 노동과 열악한 환경뿐이었다.

조선 훈련공들은 밥 한끼 배불리 먹지 못한 채 화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뜨거운 쇠관 속에 들어가 석탄 찌꺼기를 제거하는 것 같은 위험한 일을 도맡아야 했다.

처음 몇달은 용돈이라며 한달에 2~3엔씩 나왔지만 강제 징용령이 내려진 1944년부터는 이마저도 끊겼고, 못견뎌 도망치다 붙잡히면 '죽지 않을 만큼' 매질을 당해야 했다.

회사는 '돈을 주면 낭비한다'며 몇푼 되지 않는 월급마저 강제로 저금하게 했고, 통장과 도장은 '보관해주겠다'며 가져가 돌려주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살아남은 훈련공들은 월급도 받지 못한 무일푼 신세로 고국으로 돌아왔고, 징용 피해자들을 부린 기업들은 지급하지 않은 '미불임금'을 공탁소에 맡겼다.

현재까지 일본은행에 보관돼 있는 한인 공탁금은 액면가로 2억1천514만 엔에 달하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조 원대에 달한다.

◇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은 외면 = 피해자들을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한일 양국 모두 제대로 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임 소재의 문제는 197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때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 지원과 2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오며 일제로부터 피해를 본 개인들이 일본 정부 또는 기업, 개인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한국 정부는 5억 달러 중 92억 원만 강제징용 사망자들에게 지급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돈을 경제 재건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썼다.

여 할아버지처럼 일본에 끌려가 살아 돌아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국가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최소한의 동의도 없이 정부에 의해 자신들의 권리를 사실상 박탈당해버린 것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청구권 협정은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아닌 '독립 축하금'에 불과하고 설사 양보하더라도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 정부에 보상을 다 해 줬으니 받을 게 있다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청구하라는 식이다.

피해자들의 소송을 돕는 최봉태 변호사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두고 "법치주의 국가에서 피해자가 누구를 상대로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게 하는 게 가장 고약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 '소멸 시효의 덫' = 징용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내기 시작했다.

1944년 강제 징용된 이근목 할아버지(83) 등 5명은 자신들을 부린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여 할아버지 등은 일본제철의 후신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미지급 임금과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금을 달라는 소송을 냈다.

일본 법원은 소멸시효 10년이 지났다거나 원고들이 소송을 낸 기업들이 해산 후 다시 설립돼 불법 행위의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줄줄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징용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냉혹한 현실은 고국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2007년과 2009년 1, 2심에서 이 할아버지 등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배 소송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원고 측은 전쟁 범죄는 일반 민사 사건과 달리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번 사건이라고 해서 10년인 민법상 소멸시효 논리를 배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신일본제철 소송도 마찬가지로 1,2심에서 원고가 패소했다.

1,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은 "일본 정부와 일본제철에 속아 원고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로 일한 것은 불법행위로 옛 일본제철은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신일본제철은 해산 후 다시 설립돼 이번 사건의 책임이 있는 회사가 아니며 소멸시효도 지났다는 이유로 피고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들은 모두 재판 결과에 불복, 상고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백발 성성한 피해자들은 소멸시효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법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최 변호사는 "우리 법원이 인혁당 사건 같은 시국사건에서는 소멸시효를 배제한 판결을 내렸는데 비인도적인 전쟁 범죄는 달리 판단한 걸 이해할 수 없다"며 "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공개변론 방식으로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