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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년 야스나리君에게 (1)

윤춘호

입력 : 2009.07.08 17:34|수정 : 2009.12.14 13:41

배우 '모리 미츠꼬'의 축복받은 외길인생


윤춘호 특파원의 도쿄 다이어리야스나리君.

오늘은 연극배우 모리 미츠꼬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난 일요일 8시 뉴스를 통해 한국 시청자들에게 모리 미츠꼬씨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모리 씨를 모르는 일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야스나리군도 잘 그 배우의 이름은 들어봤을 테지만 간단히 그 배우에대해 설명하자면 지난 1961년부터 무려 49년 동안 '방랑기(放浪記)'라는 연극의 주연 배우를 맡아온 분입니다.

지금까지 공연 회수가 2017차례, 올해 나이가 90살입니다. 모리 미츠코 씨는 놀랄 만큼 젊더군요. 1920년생,90살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얼굴입니다. 아무리 많이 봐도 60대 초반 정도라고 해야할 얼굴입니다.

체력과 젊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건강 관리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고려해도 참 젊고 건강하고 유쾌해 보이는 얼굴입니다. 물론 화장발과 조명발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 의학의 힘도 살짝 빌리지 않았을까요?

기자회견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얼굴은 60대 얼굴인데 손은 확실히 나이가 들었습니다. 얼굴 나이는 속여도 손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검버섯 자국이 있는 모리씨의 손이 원래의 나이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지난 5월 모리씨의 생일에 맞춰 2천회 기념 공연이 열렸습니다.

90살 배우의 2천회 돌파 공연!

모리 씨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모리 씨는 2천회 기념 기자회견에서 '은퇴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2천회 공연도 했으니 좀 멀기는 하지만 3천회 공연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며 무대를 향한 식지 않은 열정을 숨기지 않더군요.

2천회가 넘는 공연에서 한 번도 대역이 없었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보도였습니다만 모리 씨 본인의 회고를 보면 49년 동안 공연을 이어오면서 폐렴을 앓은 적도 있었고 몸이 아픈 적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 두 번은 대역을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어쨌든 모리 씨가 2천회 넘게 49년 동안 <방랑기>라는 연극의 주연 자리를 지켜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체력을 포함한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을 겁니다.

저는 2천17회라는 믿기 힘든 숫자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같은 대사, 같은 동작을 같은 무대에서 2천번 넘게 하는 것. 같은 연극이라 해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은 또 다르다고 하지만 2천번을 넘는 것을 반복하는 그 행위는 체력과의 싸움 이전에 지루함과의 싸움이었을 겁니다.

그런 지루함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결과가 2천회 공연돌파겠지요.

야스나리군.

저는 사실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모리 미츠코라는 일본여배우의 인간 승리보다는 90살 현역 배우의 2천회 공연이라는 '전설'을 만든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리 씨는 41살의 나이에 그 연극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연극 내용은 2차대전 전후 일본 사람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기를 다룬 것이라고 하더군요.

61년이면 일본이 패전의 그늘과 어둠에서 벗어나 고도 경제 성장을 시작하던 땝니다.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가 서서히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던 때였을 겁니다.

배고팠던 시절이 조금은 그리운 시절로 여겨지기 시작했을 테고 사람들은 <방랑기>를 보면서 가난했지만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을 회고하곤 했겠지요. 그래서였는지 그 연극은 그래서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기를 끌면서 연극은 장기 공연 체제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연속 공연...

한 연극이 10년을 계속했다는 것은 지금 봐도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연극은 10년,그리고 20년을 계속 했습니다. 공연 시작 20년이면 80년대 초반입니다. 전후의 신산스럽던 이야기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만이 아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됐습니다.

<방랑기>라는 연극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가난했지만 인정이 살아있던 시대를 떠올릴 사람은 거의 없던 시절입니다.그쯤 되면 이 연극은 이제 인기 레파토리는 아닙니다.

이제 막을 내려도 된다,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맞다라고 호응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주인공 모리 씨 입장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한 연극에서 20년 동안 변함 없이 주인공 자리를 지켜왔다면 배우로서 큰 영광입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는 관객들의 아쉬움이 담긴 박수를 받으며 내려올 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아마도 그렇게 모리 씨도 생각했을 겁니다.

마침 초기부터 이 연극을 연출해왔던 연출자가 사망했습니다. 요모조모 헤아려보면 그 때가 연극도 막을 내리고 모리 씨도 주인공 역을 놓을 適期였습니다.

그런데, 그 연극은 계속 됩니다.

     

30년, 이제는 정말 <방랑기>를 마칠 때라고 누군가 말했을 겁니다. <방랑기>라는 연극을 내릴 수 없다면 70이 넘은 모리 미츠코로는 더 이상은 무리라고, 적어도 주인공이라도 젊고 예쁜 배우로 바꿔야 한다고 다른 누군가가 말했을 겁니다.

그래도 이 연극은 계속 됐습니다. 70이 훨씬 넘은 모리 할머니는 30대,40대 주인공 역할을 계속 맡습니다. 40년....그리고 49년..

무엇이 이 연극을 49년 동안 계속 공연되게 했을까요.

무엇이 모리 할머니가 70을 넘기고 80을 넘기고 구순의 나이가 되어서도 젊은 주인공 역할을 하도록 했을까요.

관객이었을 겁니다. 일본 관객들, 일본 사람들 말입니다.

10년, 20년쯤은 연극이 재미있어서 관객들이 왔겠지요. 자신들의 어려운 시절을 그려내고 있는 그 연극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 연극은 롱런했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이후는 연극보다는 모리 씨가 화제였을 겁니다. 70넘은 할머니 배우의 열연...그리고 30년이 넘은 장기 공연작이라는 것들이 관객을 끌어들였을 겁니다.

<방랑기>가 아니라 모리 씨가 관객을 불러왔을 겁니다. 모리 씨가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 홍보가 됐을 테고 무대에 선 모리 씨의 모습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왔을 테고 말이지요.

모리 씨가 아닌 다른 배우가 주인공이었다면 <방랑기>는 30년,40년 그리고 반세기 연속 공연의 신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방랑기>장기 공연은  모리 미츠코라는 배우와 관객들이 함께 <기록 만들기>도전사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과 일본 미디어가 가담한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일본 사회 전체가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모리 미츠코 전설 만들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 무언의 약속으로 49년 공연, 2천회 공연, 90살 현역 배우의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야스나리군.

모리 씨 이야기가 일본 사람들이 가장 높이 친다는 이른바 잇쇼겐메이(一生懸命)가 아닐까요.

한가지 일에 평생을 건다는 것.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회 전체가 나서는 나라, 저는 일본이 그런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깊이있는 시각과 연륜이 느껴지는 윤춘호 기자는 2007년부터 SBS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91년 SBS 공채 1기로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국제부 등에서 일했고 특히, 북한 관련 취재와 통일안보분야, 국회 정당팀에서 오랜 기간 활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