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접점' 찾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국민의 알 권리'와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피의자의 방어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이 수사 상황을 매일 브리핑하는 게 과연 옳은가', '검찰의 브리핑 내용을 언론이 검증도 없이 그대로 보도하는 게 맞는가' 등을 놓고 검찰과 언론에 대한 각계의 질책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기자들의 반성 어린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고, 검찰도 '수사 브리핑 관행'에 대한 제도적인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법원에서도 '피의사실 공표' 논란 불거져그러던 중 이번엔 법원에서 '피의사실 공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발단은 연예기획사 대표의 여성 연예인 성폭행 사건.
수사 주체였던 경찰은, 여성 연예인에게 이른바 '노예계약'을 강요하고, 이 연예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혐의로 지난 24일 모 연예기획사 대표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25일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 구속영장이 공개된 것은 다음날인 26일. 서울중앙지법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관행'에 따라 아침에 법원 영장계에 들러 전날 발부된 영장을 열람한 뒤 '기사가 될 만한 사건'이라고 판단해 영장을 복사했던 것입니다.
법원 기자들은 이 영장 내용을 다시 경찰 담당 기자들에게 '토스'해줘 일부 언론에서 이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에게 '기자들이 알게 됐다'는 사실을 알렸고, 여성 연예인은 휴대전화를 두고 집을 나가, 29일인 오늘까지 가족들과도 연락이 안 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속영장 내용이 공개된 것을 놓고 경찰은 법원에도 강한 유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상황이 이렇자 법원은 급기야 '구속영장 복사 금지'를 기자들에게 통보했습니다. 영장 복사를 놓고 그동안 크고작은 논란이 있어 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영장 열람 문제를 전면 재검토해 보겠다는 뜻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새로운 '접점 찾기'가 필요한 때
형법 126조는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피의사실 공표죄'입니다.
지금까지 처벌된 사례는 드물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나 이번 연예인 성폭행 사건이 쟁점화할 경우 검찰이나 경찰, 법원도 책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관측입니다. 물론 그 한가운데엔 언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법원이 영장을 보여주는 것은 언론의 요구에 따른 측면이 큽니다. 언론은 그 근거로 헌법상 개념인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웁니다. 검찰이나 경찰이 공판청구, 즉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직접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법원에서 발부된 영장을 통해 기자들이 간접적으로 정치인의 비리와 같은 피의사실을 취재해 왔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영장 내용을 근거로 추가 취재해서 보도하되, 영장 사본을 촬영하거나 외부에 유출하지 않고, 특히 범죄 소명 부족 등으로 영장이 기각된 경우는 영장 내용을 보도하지 않기로,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왔습니다. 이에 앞서 민감한 사안인 경우 검찰이 미리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뜻을 법원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라는 개념이 거만하거나 사치스럽게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연 국민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 싶어 할까',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워 취재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닐까' '기자에게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하도록 한 권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 권력을 견제하거나 감시하는 '언론의 순(順)기능'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수사기관이 손을 못대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에 의해 촉발된 수사가 적지 않습니다. 또, 수사기관의 상위 권력이 '수사 중단'과 같은 압력을 넣는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언론을 이용해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적도 있습니다. 나아가 갈수록 '권력기관화' 되는 수사기관 자체를 견제하는 역할도 일정부분 언론의 몫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와 '피의사실 공표 금지'가 충돌하는 개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둘다 필요한 개념인 것도 분명합니다. 과거 법원에서 영장 복사를 허용하기로 한 것은 두 개념의 '접점(接點)'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접점 찾기'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동안 언론의 잘못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고, 법원이나 검찰이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비해 상당히 중립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부 언론 학자들은 '수사 시작이나 진행 단계가 아니라, 피의자의 방어권이 충분히 갖춰진 법원 재판 단계에서부터 보도를 하기 시작해야 한다'며 언론의 취재 관행의 대대적인 수술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또, 갈수록 치열해지는 언론의 취재 경쟁 등을 감안해 피의사실 공표가 문제될 수 있는 경우엔, 수사기관이 법원에 공개 금지를 요청하는 방안도 구체적인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외압 때문에 아예 수사를 하지 않거나 중간에 덮어 버리지 않도록, 반대로 과도한 권한 행사 때문에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일정정도의 견제 도구는 여전히 필요할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 같은데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본능에 따라 과거로 회귀하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언론의 역할이 필요 없으면 가장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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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03년 신문기자로 시작해 2007년 SBS에 입사한 김지성 기자는 사회2부 법조팀에서 검찰 출입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뚝심있고 끈질긴 기자정신으로 현장을 누비는 김 기자는 정치부에서도 활약했으며, 2003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숨겨놓은 비자금'과 관련한 특종보도로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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