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노무현 전 대통령, 이 시각 이동상황은? ②
2km, 2시간의 슬픔
서울 도심을 가득 채운 노란 애도의 물결. 지난 5월 29일은 해가질 때 까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일 이었다. 오후 2시쯤 영결식과 노제는 끝난 뒤에도 서울시민들은 고인을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고인의 화장지 수원 연화장으로 떠나는 출발장소로 알려진 서울역에 있었다. 고속도로 상에서 전달할 휴대전화 특보를 예상하며, 손 글씨로 기사를 적고 있었다. 서울역을 출발하고도 추모행렬은 고인을 따라왔고, 2시간동안 고인과 함께 도심에서 머물렀다. 기사 초안은 모두 버려야 했다.
오후 3시 반. 운구행렬이 서울역을 출발했다는 클로징 멘트와 함께 오후 1차 특보가 끝났다. 영정차와 운구차 등 행렬은 삼각지를 거쳐 녹사평, 반포대교를 가도록 돼 있었다.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는 휴대전화가 불통되기 쉬웠다. 우리는 행렬을 앞질러 삼각지 로터리에서 녹사평 방향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서울역을 바라보며 행렬이 오는지 목이 빠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4시 쯤. 다시 특보가 시작됐고, 현재 운구행렬의 이동상황 전화연결 주문이 왔다. 이동상황만 예상하고 만든 초안은 쓸모가 없었다. 10분 만에 기사를 새로 썼다. 행렬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개요를 짰다.
'운구 행렬이 서울역을 떠난 지 얼마가 지났지만, 아직 남영동에 머물러 있다. 시민 수천 명이 행렬을 놓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이동경로는 삼각지에서 반포대교를 거치는 코스다. 경찰도 이동행렬에 수십 명 배치돼 있다. 행렬 시민들은 어떤 표정으로 애도를 한다. 수원 연화장 까지는 45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다. 지금 출발해도 해질 무렵 도착한다. 현재 연화장엔 시민 2천여 명이 나와 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행렬은 도보 속도보다 느리게 걷고 있었다. 운구차 바로 옆에서 애도하는 시민들을 묘사할 만큼 우리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시간이나 위치, 경찰 모습, 이동예상 경로 등은 팩트였지만, 이 부분에서는 사실 좀 전에 보았던 것을 타전했다. 다가가면 전화가 끊길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보 마지막에 비슷한 상황에서 또 한 번 특보를 전했다. "서울시민들은 고인을 보낼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리포트가 끝나자 앵커 선배는 말했다.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그만 고인을 놓아주십시오." 전화 연결을 마친 안도감 속에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해는 넘어가는데 마포방향으로 넘어가는데, 도저히 운구행렬은 삼각지조차 도착할 줄을 몰랐다. 벌건 해를 보자니 속이 더 탔다. 차를 돌려 행렬을 찾았다. 그 시간 이미 남영동대로에 영정차는 없었다.
불과 10분 뒤에 이동특보가 예정된 상황이었다. 이젠 운구행렬을 보지 않고는 새로운 상황을 전달할 도리가 없었다. 용산경찰서를 취재해 이동 지점을 확인했다. 용산구청 사거리 앞. 행렬을 만났다. 한강대교로 가려다 삼각지로 영정차가 방향을 트는 사이, 다시 추모객들이 행렬을 에워쌌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생처럼 보였다. 만장을 들고 지치는 기색도 없이 걷다가 뛰고, 뛰다가 걸었다.
영정차 뒤론 운구차가, 그 뒤론 측근들을 태운 십 수대의 장례차량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수백 미터의 차량을 에워싸고 걷는 그들을 보고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오후 5시. 긴 그림자 정반대로 저무는 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호한 발걸음을 보고, 난 전화특보에서 '마치 연화장까지 함께 걸어가려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고인을 잃은 슬픔은 애도로, 애도는 끝 모르는 발걸음을 불렀다. 슬픔은 또, 더 심한 슬픔도 불렀다. 그건 분노였다.
놓아주지 않기 - 분노의 표출
오후 5시부터 운구행렬은 용산구청 고가도로에 갇혔다. 그 날 오후, 고인의 영정은 시민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정차 운전자만큼은 시민들을 따돌리느라 분주했다. 화장이 예정된 오후 3시 반은 훌쩍 넘기고도 서울을 뜨지 못하는 탓에, 초조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기사로 묘사하기란 난감했다. 애도하는 시민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원인. 그것에 대해 난 '깊은 슬픔'이라는 보편적인 감정 때문이라고 전했다.
마지막 2시간은 분노를 표출하는 시위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구호도 외쳤다. "독재타도, 이명박 퇴진"이라고 외쳤다. 이명박 정부가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못 보낸다고 고함지르고, 책임지라고 외쳤다. 강화플라스틱 갑옷을 입은 전경 수백 명 앞에서 정권을 타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정대로 고인을 보내지 않고 붙잡음으로서, 사람들은 강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도심을 한참 머무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고가를 에워싼 사람들은 권력에겐 불편한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취재차량에도 강한 적개심을 보였다. 손으로 차량을 마구 쳐서 보닛과 차문이 찌그러졌다. 마지막 전화중계엔, 내 음성과 함께 현장음으로 이 소리가 들어갔다. 그들이 '고인을 차마 떠나보낼 수 없어 행렬을 뒤 따른다'라는 라이브 중계 내용과는 너무나 다른 야유가 빗발쳤다. 슬픈데다가 씁쓸했다. 5시 반. 고가도로 한 가운데 쯤에 멈춘 차에서 노건호 씨가 내렸다. 비켜달라는 설득 끝에 운구차는 서울을 떠났다.
운구행렬이 모두 떠난 고가. 오후 5시 40분쯤 전경 1명이 쓰러지는 응급상황이 터졌다. 너무 빨리 고가오르막길을 뛰어오른 탓인지 제대로 숨을 못 쉬었다. 운구행렬을 따르던 시민들의 야유와 비협조(?!) 덕분에, 고가에 남은 운송수단이라곤 다행히 우리 취재차량뿐이었다. 뉴스센터에 전화를 걸어, 고인을 놓쳐 더 이상 특보를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와 그의 동료를 태우고 달렸다. 한남동 순천향병원을 향해 달리던 도중, 순찰차를 발견하고 내려줬다. 경기도 수원 어느 경찰서 소속이라는 그의 동료로부터 그 전경이 무사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희극과 비극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일은 꼭 두 번 일어난다'는 말을 했다. 마르크스는 이 말에 위트를 겸한 말을 남겼다. '헤겔의 말은 맞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빠뜨렸다.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란 한 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두 번 일어난다.' 지난 4월 30일 나는 검찰조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그의 버스를 쫓았다. 마지막은 고인이 된 그와 그를 추모하는 행렬을 쫓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의 서거 전후로 방송사들의 보도행태가 어떻게 변했나 꼬집는 기사를 쓰고 있다. (그 때마다 왜 M사와 K사의 방송장면을 리드삼아 보도한다. 비슷한 보도마다 우리 매체는 늘 기사로만 처리된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 마다, 그들의 독자들이 우리 매체를 '조중동 프랜들리' 매체로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지난 4월말 검찰 소환 전화중계를 예로 들어가며, 그의 소환 사실을 '스포츠 중계'하듯 다뤘다고 꼬집었다.
조중동의 보도엔 물론 더 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중동은 그가 죽음을 택하자마자, 제왕적 대통령제가 고인의 죽음을 불렀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기사를 썼다. 방송의 보도행태와 이런 프레임 가운데 무엇이 더 비판받을 일인가는 시청자와 독자가 가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중계'하듯 고인을 쫓았다는 스트레이트 기사가 가슴에 콕 박히듯 남는 건 사실이다.
고인이 생전 느꼈을 절박한 슬픔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하다. 죽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쓴 공개 글에서, 언론을 향해 마당에 나올 자유만큼은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검찰수사가 끝나고 그가 봉하마을 저택으로 돌아온 뒤에도, 언론은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나도 5월 초 며칠을 거기서 보냈다. 까치발을 세워가며, 행여나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MBC는 지난 3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민심 여론조가 결과를 보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책임이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결과도 있었다. 60.8%의 응답자는 그의 죽음이 본인이 아닌 외부의 책임이라고 했다. 이들 가운데 21%는 언론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39%로 1위, 검찰은 27%로 2위. 언론은 3위였다. 지난 6일자 <시사인>은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 검찰은 항복선언 요구했다'는 기사에서 검찰출두 생중계 당시 고인의 표정을 취재해서 전했다. <시사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을 이동중계 하기 전, 노제가 있기까지 며칠 동안 덕수궁분향소와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에서 취재를 했다. 조문객 숫자나, 유명인사의 면면 등 팩트를 챙기고 하루종일 중계차를 타고 정신없는 날을 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선 방송사 뉴스 모니터를 하며 울었다. 추모객 인터뷰이들을 보며 한나절 뒤늦게 울었다.
다시 그의 이동경로를 중계할 일은 없다. 나는 내 일에 책임을 다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언론이 책임있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가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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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사회2부 사건팀의 최우철 기자는 2007년에 SBS에 입사한 새내기 기자입니다. 특유의 적극성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건 현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작지만 빛나는' 진실을 찾아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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