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로 출장을 떠나면서 '평생 내가 언제 여길 가보겠냐...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생각을 했다.
막상 가보니 분명 색다른 경험이긴 한데, 이곳의 일상은 웬지 낯이 익었다.
원정대가 내려와있는 동안 뉴스는 잠시 쉬었다.
그러니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뭘 해보려 해도 잘 안 되고...그렇다. 군 생활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먹고 잘 때까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원정대도 마찬가지였다.
8천미터 가까이 올라가면 체력 소모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체력 소모가 워낙 심하기 때문인지...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오로지 '휴식'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원정대에겐 딱 세가지 시간이 존재했다.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 그리고 카드놀이하는 시간...카드놀이를 즐기지 않는 나에겐 두가지 시간밖에 없었다. --;;;
출발하기 전날, 휴대전화로 베이스캠프에서 위성 전화가 걸려왔다.
나보다 한 달이나 먼저 출발해 베이스캠프에서 한 달 가까이 생활하고 있던 박준우 PD였다.
박준우 PD는 여기 들어오면 무진장 심심하니 읽을 책 꼭 가져오고 재밌는 동영상을 가능한 많이 다운받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하다가 오랜 시간 있어야하니 금세 읽어버릴 소설 같은 것 보단 천천히 읽는데 좀 시간이 걸릴 책을 가져가자고 생각하고 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담대한 희망'을 들고 왔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여러 차례 책을 집어들었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결국 그만뒀다.
대신 국장님이 가져온 추리 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원정대원들이 가져온 히말라야에 대한 책도 읽었다.
노트북엔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를 잔뜩 담아갔다.
그러나, 태양전지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에도 벅찼고 발전기는 돌릴 때마다 기름이 들어가고 이는 곧 돈이니 방송과 상관없는 이런 여가 생활을 위해 돌리는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동영상은 잔뜩 있지만 내 노트북 배터리가 허락하는 분량, 하루에 한 편 보는게 고작이었다.
사람들과 노가리를 푸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어떤 날은 아침 먹고 자고, 깨워서 일어나 점심 먹고, 잠깐 사람들과 농담 따먹기 하다 또 자고, 그러다 저녁 먹고, 또 자는 걸로 하루가 끝난 적도 있었다.
정말 무료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고산병보다도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의 무료함이었다.
주변 다른 곳을 다녀오면 되지 않냐고?
고소에 적응이 어느 정도 됐다고는 하지만 5천미터 급에서 일반인이 많이 움직이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반경 50미터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먹는 건 잘 먹는다.
원정대가 잘 먹는만큼 힘을 쓴다고 믿기 때문이다.
끼니마다 제빵사 자격까지 갖고 있고 요리엔 일가견이 있어 자타 공인 '푸드 매니저'인 동민이형이 진두 지휘했다.
또, 박 대장의 원정 때마다 cook으로 참여한 믿음직한 셀파 '두르바'가 홍어회, 삼겹살, 돼지고기 두루치기, 버팔로 불고기, 염소탕, 동태찌개, 볶음밥, 짜장면, 스파게티 등등 이 산골짜기에서 이런 훌륭한 음식이 나오다니...라는 감동이 나올만큼 훌륭한 음식을 제공해줬다.
동민이형과 두르바는 올라오면서 잃어버렸던 내 입맛을 완전히 돌려놨다.
간식까지 만들어주고 원정대가 가져온 과자들도 있으니 먹을거리는 정말 푸짐했다.
올라오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했으니 분명 살이 빠졌을텐데 베이스캠프에 있는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먹기만 하니 도로 살이 찔 것 같았다.
가끔씩은 술도 마셨다.
원정대는 맥주도 여러 박스 가져왔고, 소주도 가져왔다.
나는 맥주 축제보러 독일에 갔을 정도로 맥주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가끔 술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맥주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고소에선 훨씬 빨리 취하기 때문에 아직 내 상태로는 맥주 한 모금이라도 마실 자신이 없었다.
그림의 떡이 따로 없었다.
이런 지루한 일상에 사건이 하나 생겼다.
베이스캠프에는 30개 가까운 원정대가 있었다.
일주일 정도 날씨가 안 좋을 것으로 예보되자 아예 밑으로 내려간 원정대도 많았다.
빙하 위 텐트에서 자는 것보다는 롯지의 침대에서 자는게 훨씬 몸에 좋으니까...
남아있는 원정대들은 피차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원정대 텐트 앞을 금발 여성들이 기웃거렸다.
뭘까??
크로아티아 여성 등반대였다. 11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원정대.
이들도 심심하던 차에 베이스캠프의 다른 원정대 탐방을 나선 거였다.
박영석 대장은 두 달만에 사람 구경했다며 무진장 기분이 좋아졌다. (난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
맥주잔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자리는 한국식 술자리로 변질돼갔다.
나는 여전히 그림의 떡인양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있었는데 크로아티아 원정대가 팝송을 하나 불렀다.
그나마 술을 안 마셔 제일 멀쩡했던 나에게 답가를 하란다.
한국 노래를 해도 아무 상관없는데 왜 팝송을 하려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팝송을 부르려니 가사가 생각나는게 없었다.
가장 무난하게 가자며 'Let It Be'를 자신있게 생각했는데 두번째 소절부터 가사가 막혔다 --;;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흥이 많은가보다.
크로아티아 원정대는 유치원에서 부르는 "우리 모두 다함께 손뼉을" 노래를 부르며 온 몸으로 율동까지 했다.
그러면서 크로아티아 팀은 우리를 자기네 캠프로 초대했다.

다음날 저녁,
박 대장은 신이 났다.
동민이형은 대장의 지시로 케익을 만들어야 했다.
두르바는 버팔로 불고기를 만들어 들고 갔다. --;;;
크로아티아 팀은 살라미 소시지와 비스킷을 준비해놨다.
그렇게 즐기면서 베이스캠프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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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보도국 문화부의 젊은 피, 유재규 기자는 종교계와 대중문화, 문화재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05년 SBS에 공채로 입사한 뒤 국제부를 거쳐 사회2부 사건팀을 거쳤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시선으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유 기자는 최근엔 박영석 원정대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도전을 현지에서 동행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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