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감독: 홍상수, 주연: 김태우, 엄지원, 고현정, 18세관람가)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제작비 2억 원의 초저예산 영화인데, 출연 배우들 면면을 보면 김태우, 고현정, 엄지원, 공형진, 정유미, 유준상, 하정우 등 여타 영화에서 주연급의 비중에 연기력도 풍부한 배우들이 자청해서 노 개런티로 출연했고 어떤 배우는 홍상수 감독에게 제발 출연시켜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갈수록 투자받기가 어려워 [밤과 낮]을 찍을 때 심한 절망에 빠지기도 했던 홍 감독에게 이런 지원은 큰 힘이 된 듯합니다.
프랑스 예술영화 풍으로 알쏭달쏭 난해한 듯해 해외에서는 인정을 넘어 존경까지 받는 감독이 국내에서는 영화 찍는데 최소한의 투자가 안 되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요. 또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은데 흥행성적은 신통치 않은 것도 그 원인이 뭘까 궁금합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후 8편의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세계는 점점 비극에서 희극으로, 절망감에서 넉넉함으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생생한 묘사력으로 계속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그건 감독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관찰과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건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키득거리며 마치 인기 시트콤을 보듯 봤으니까요. 등장인물들 이름부터가 재미있습니다. 주인공은 구경남(김태우)이고 부상용(공형진), 공현희(엄지원) 등 이름만 들어도 그 인물의 특성과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에 대해 대충 감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 제천과 제주를 무대로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됩니다. 영화감독 구경남은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제천을 찾습니다. 여기저기 술자리에 어울리느라 정작 영화 심사 때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이고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공현희의 뜬금없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친한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 그 집에 초대받아 술을 먹은 뒤, 오해인지 뭔지 모를 이유 때문에 봉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선배 초청으로 영화과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가는데 거기에서는 또 노화가와 그의 부인 고순(고현정)과 얽히게 됩니다.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고, 발생하는 에피소드들 속에 녹아있는 인간의 습성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역학과 전개 과정 등이 펼쳐지는데 치밀한 묘사력과 재미있으면서 깊이 있는 대사들로 마치 관객이 그런 뻘줌하거나 난감한 상황속의 일인이 되어 그 상황을 직접 겪는 것 같습니다.
영화 초반부 영화제 파티 장면에서 소설가 김연수 씨가 연기한 후배 감독과의 묘한 경쟁의식과 질투는 조직의 위계나 시스템이 약한 영화계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나 권력관계를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한 여배우 모녀의 고군분투, 후배 부상용의 호의와 오해, 노 화가의 뜬금없는 욕망의 표출과 실현, 착하고 성실한 이웃인 젊은 조각가의 과잉친절과 투철한 시민의식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들의 충돌과 그 후폭풍에 대해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의 제목이자 고순의 대사처럼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라."는 발언을 통해 본인 편하자고 나이 들수록 점점 활용도와 의존도가 높아지는 인간의 통념이나 선입견의 폐해를 에둘러 지적합니다. 그냥 생각 없이 키득대며 보는 코미디가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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