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 토리노(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비 방, 12세관람가)
나이 들면서 관절이 굳어 몸이 뻣뻣해지는 것처럼 마음과 생각까지 덩달아 굳어지는 분들 많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안 혹은 거리에서 요즘 버릇없는 젊은것들에서부터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궁시렁대는 어르신들을 가끔 마주칩니다.
이런 분들의 굳어진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감히 말을 섞는다거나 하는 시도는 아예 꿈꾸지 않는 게 상책이죠. 당사자들은 점점 주변의 담장을 높이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평온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평온은 고립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하구요.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딱 그런 꼬장꼬장한 고집불통 노인네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훈장까지 받았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경제력의 상징이었던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며 화목한 가정을 일궈냈고 이제는 아내를 사별한 쓸쓸한 처지입니다.
남편 좀 제발 참회와 속죄의 길로 이끌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숫총각 애송이 신부님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귀찮게 하고, 제 가족 챙기기에만 전념하느라 늙은 애비는 안중에도 없는 자식들 그러려니 하는데 큰 아들이 일본차 세일즈로 먹고사는 것은 영 못마땅합니다.
얼굴 곳곳을 피어싱으로 치장하고 차고에 숨어들어가 담배를 피워대는 손녀와 마주치는데 이르면 "내가 이런 꼴 보느니 차라리 빨리 황천길로 가는 게 낫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인데요. 뼛속까지 인종주의자인 이 노인네 옆집에 듣도 보도 못한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모를" 베트남 소수 민족인 몽족 일가가 이사까지 오네요. 맙소사.
그 집의 아들인 소년 타오는 사촌형이 이끄는 '몽족 갱단'의 가입권유에 시달리는데 가입 신고식 격으로 월트가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아끼는 1972년형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미수에 그칩니다.
이제부터 백인 노인과 이민 온 동양 소년 사이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꽃이었던 시기에 전쟁에 참전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들 낳고 열심히 일하며가정을 일궈왔지만 자식에게 기댈 필요 없다는 꼬장꼬장한 성격에 맥주와 육포로 쓸쓸한 허기와 마음속 깊이 새겨진 전쟁 체험의 상처를 달래는 노인입니다.
이런 노인이 타오와 그 가족과 접촉하며 변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전개되는데요. 한창때 백인들이 살던 동네에 살지만 이제는 백인들은 교외의 더 넓고쾌적한 곳으로 떠나고 다양한 이민자들로 채워지며 슬럼화 되는 영화 속 동네는 현재 미국 사회의 축소판 같습니다.
화려한 감각이나 잔재주를 멀리하고 이야기의 힘만으로 밀고 나가는데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들면서 노장이자 거장의 노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이발사와 나누는 인종적, 민족적 모욕이 가득 담긴 욕설과, 찾아간 병원에서 인도출신 간호사가 월터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하며 여러 차례 부를 때 당황하는 어정쩡한 모습 등 넉넉한 유머도 많이 깔려있습니다.
흑인 불량배들이나 몽족 갱단들과 상대할 때의 노인답지 않은 대담함으로 왕년의 더티 해리 모습도 슬쩍 깔아주는 등등장인물들 하나하나 뿐 아니라 자동차와 라이터, 몽족이 베트남전 당시 미국편에 섰다가 대거 추방당한 이력이 있다는 등의 소품과 극적 장치들은 곰곰이 따지고 들어가면 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의미를 품고 있더군요.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잔가지를 잘 만들어내면 '야동순재'를 탄생시켰던 [거침없이 하이킥]같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트콤으로도 한 시즌 너끈히 소화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배우로서 은퇴작인 [그랜 토리노]는 다소 보수적이지만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뒤늦게 깨우쳐가는 현명한 노인이 한사람의 미국 시민으로서 자식과 후손들에게 남기는 유언장 같습니다.
좋은 시절도 있었고 끔찍한 경험도 했었고, 못마땅한 것들 투성이지만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너희들은 되도록 좋은 것만 겪고 나쁜 것들, 무서운 것들은 겪지 말라고…….
용서와 희생의 짐을 조금이나마 짊어질 테니 세상을 더 이상 나쁘게 만들지는 말아달라고…….
의미 없는 폭력은 이제 그만둬 달라고…….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화두를 던져주며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쇳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깔리며 끝을 맺습니다.
(* 올해 우리나이로 8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익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인공으로 시작해 더티 해리 시리즈로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리다 감독으로 변신해 배우시절의 인기보다 더 깊고 뜨거운 존경과 사랑을 받고 소위 '민망한 노망' 대신 부러운 '총기'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 비결이 뭔지 궁금합니다. 혹시 치매예방에 좋다는 고스톱..?)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