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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박 반장] 김 의장의 시련…시작일까? 끝일까?

박병일

입력 : 2009.03.08 11:49


정치부 박병일 기자입니다. 국회의원이라면 꼭 해보고 싶은 직책 가운데 하나가 국회의장입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5선 이상 선수가 쌓여야 하고 집권을 한 정당의 소속이어야 하고, 또, 운대도 맞아야 합니다. 3부 요인 가운데 의전서열로 보면 대통령 다음입니다.

(참고로, 차량 번호와 관련해 잘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던데, 대통령은 차량 번호가 없기 때문에 국회의장의 차량번호는 1002번이 아닌 1001번입니다. 5부요인의 의전순위 차량 번호가 부여되며, 여당 소속 국회부의장이 1006, 야당 소속 국회부의장이 1007번입니다)

국회의장은 권위가 생명입니다. 국회의장이 권위를 잃게 되면 국회를 제대로 운영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국회의장이 되면 소속 정당 (여당)을 탈당하게 됩니다. 소속 정당에 치우침이 없이 공정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아무래도 친정인 여당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여당 편을 들게 될 경우 야당의 반발로 국회를 제대로 운형할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당과 야당이 극한 대치로 치달을 때 국회의장으로서 가장 고민스런 입장에 처하게 마련입니다.

2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예정됐던 지난 2일.. 김형오 국회의장의 시련은 시작됐습니다. 김 의장이 주선한 중재안이 여당에 의해 거부됐고, 이날 오전 김 의장은 시내의 한 호텔에서 한나라당 최고위원들과 회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낮 김 의장은 예정된 본회의를 취소하고 직권상정 절차에 돌입했습니다.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면서 김 의장에 대한 징계안까지 제출하게 된 배경입니다.

(참고로, 국회의장에 대해 징계안이 제출된 것은 지난 3대 국회 때 4사5입 개헌 문제로 이기붕 국회의장이 윤리위에 제소된 지 55년만입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이에 격노하여 지난 6일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민주당의 잘못을 나에게 덮어씌우려는 비열한 행동"이라고 항의했고, 이에 맞서 정 대표는 "한나라당의 말만 믿고 약속을 깬 국회의장이 비열하다"고 언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정치판에는 흔히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5,16대 국회 때 여야의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들이 자기 소속 정당의 대표를 속이기 위해 짜고 치는 연기를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 이번 경우처럼 국회의장이 매우 난감한 지경에 빠진 경우, 야당이 의장 공관을 점거하고 국회의장은 일부러 창문 쪽에 나타나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자들에게 사진 찍을 기회를 주곤 했습니다. 여당 소속의 부의장에게 넘기라는 여당 측의 압력과 그럴 경우 국회에 극한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며 말리는 여당 측 압박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진퇴양난을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야당이 일부러 국회의장이 이런 모습을 연출할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국회의장이 한남동 공관에 있었지만 민주당이 공관 점거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칫 김 의장이 사회권을 여당 소속의 이윤성 부의장에게 넘길 경우 쟁점법안이 모두 강행 처리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옛날과 같은 짜고 치는 고스톱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중재를 시도하고 또 직권상정 압박을 가함으로써 여야 간에 타협을 이끌어낸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타이밍이 한 박자씩 늦음으로써 여와 야 모두로부터 궁지에 몰리는 상황을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지난 1월 국회 때 김 의장은 여당의 거센 압력에도 불구하고 직권상정을 거부했습니다. 야당으로부터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여당으로부터 갖은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2월 국회에 들어서는 갑자기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듦으로써 야당으로부터 징계요구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여당으로부터 칭송을 받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당 내 일각에서 국회의장의 복당을 막아야 한다는 반발까지도 불러오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홍준표 원내대표는 지난 달 말에 김형오 의장이 직권상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원내대표직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회의장과 함께 논개처럼 죽으련다"라고 하소연 하며 간접 압박을 가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김 의장이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듦으로써 전세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홍 원내대표는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겠다고 말합니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는 3월 2일, 미디어관련법과 관련해 김 의장이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 들자 여당에게 협상을 제의해 미디어법을 100일내에 표결처리하기로 양보했습니다. 당내에서 갖은 비판에 직면하면서 원 원내대표는 사퇴의 뜻을 밝혔다가 3월 3일 본회의에서 법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다시 사퇴론이 쑥 들어갔습니다.

여야의 원내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사지에서 생환하게 됐지만, 그 대신 김형오 국회의장은 임기 중 최대의 위기와 궁지에 몰리게 됐습니다. 흔히들 '스타일리스트'로 평가받는 김 의장이 여야의 대치 속에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고 권위마저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4월과 6월 재연될 입법전쟁을 앞두고 국회의장을 사전에 압박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담겨 있습니다. 여당의 압박은 더 심해질 것이고 야당의 반발은 더 거칠어질 겁니다.

5선의 국회의원인 김형오 국회의장은 과거에 당 사무총장과 원내대표, 그리고 과기정통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장은 사무총장이나 원내대표, 상임위원장과는 다릅니다. 권위를 잃게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과거와 같은 '짜고 치는 고스톱'도 없어진 요즘 같은 정치판에서는 여야 대치상황에서 묘수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국회의장이 옛날보다도 훨씬 어려운 자리일 수 있습니다.

김 의장은 두 번의 입법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꼈을 것으로 봅니다. 당장 4월 임시국회에서부터 또 다시 시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김형오 의장이 잃어버린 권위를 다시 곧추 세우고, 무너진 여야 간의 그리고 국회의장과 여야와의 신뢰관계를 복원해 낼 시간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김 의장에게는 정치 인생에 있어 최대의 시련기가 될 수도, 반대로 최고의 전성기가 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