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국제

'연설달인' 오바마, 알고보니 '앵커맨'

입력 : 2009.03.06 11:28


'연설의 달인'이라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리 준비된 원고를 그대로 읽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스크린을 통해 원고를 보여주는 텔레프롬프터(자막기)가 스마트폰인 '블랙베리'와 언제나 가까운 거리에 대기중인 전화기와 함께 오바마 대통령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통신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보건장관에 지명한 캐슬린 시벨리우스를 소개할 때에도 백악관 이스트룸에 설치된 2대의 자막기에 눈을 고정한 채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대통령의 소개가 끝나고 자막기가 바닥 밑으로 내려가자 소감을 말하려던 시벨리우스 지명자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오바마는 미소를 띤 채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들이 자막기를 이용한 지는 반세기가 넘었지만, 오바마처럼 폭넓게 의존한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다.

자막기는 전직 대통령들이 취임사와 의회 연설 등 가장 중요한 연설에서 사용했던 것과 달리 오바마는 일상적 발표, 심지어 기자회견 오프닝 발언 때도 사용하고 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5일 전했다.

내무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이 11살 때 국립공원에서 놀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한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언급도 자막기에 뜬 원고를 읽은 것이었다는 것.

오바마에게 자막기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원칙을 의미할 수 있다. 대통령 당선의 길을 연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이후 자막기에 의존해왔다는 점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오바마를 '로봇'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대선후보 시절 자막기가 없을 때 말을 더듬는 장면을 보여주는 '텔레프롬프터프레지던트'라는 사이트가 떠 있다.

자칫 자막기에 의존하다가 기기고장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등 몇몇 전직 대통령들은 자막기에 얽힌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1993년 클린턴은 의회 연설 때 자막기에 엉뚱한 원고가 올라오는 바람에 7분간 즉석연설을 해야 했고, 97년 국정연설 때는 자막이 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애를 먹기도 했다.

부시는 2002년 유엔 연설 때 자막기에 핵심 구절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즉석연설을 했는데 애초 해야 할 말은 resolution(결의)이었으나 부시는 resolutions(대책)로 잘못 말해 유럽이 유엔안보리 결의안 채택을 촉구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이처럼 자막기는 전직 대통령들과는 애증관계를 지속해왔다. 해리 트루먼은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며 자막기를 사용하라는 참모들의 간청을 뿌리쳤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자막기를 처음 사용한 대통령이었지만 "염병할 프롬프터"라고 투덜댔다.

오바마가 자막기에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두고는 공화당 측 연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부시 백악관의 공보국장이었던 케빈 셜리번은 "오바마를 연기자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백악관 공보국장을 지내고 대선 때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연설을 담당했던 니콜 월리스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앵커맨' 오바마를 두둔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