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전의 일이다. 직장 생활 초년을 기업의 경제조사실이란 곳에서 시작했다. 매년 한 때가 되면 인근의 경제연구소들을 방문하는 게 일이었다. 분기, 반기 혹은 한해의 경제전망을 하기 위한 자료 조사차였다. 그런데, 다른 자료에는 관심이 없고 그 기관이 전망해놓은 자료만을 구했다.
그렇게 한두개 씩 자료가 쌓이면, 그 다음은 숫자 짜맞추기 작업에 들어간다. 작업은 여러 자료의 숫자를 그럴 듯 하게 변형하거나 조합하는 것이다.
전망 작업에 '화룡점정'은 마지막 작업인데, 대충 짜맞춘 숫자에 '동물적 감각(animal instinct)'을 가미하는 과정이다. '감'을 이용해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다할 기준은 없고, 단지 '이보다는 낫겠지'나 '이거 너무 센데' 정도의 판단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숫자들이 '경제전망'이라는 명찰을 달고 시중에 나간다.
경제 이론이나 통계 기법이 그 사이 많이 변했을 수도 있지만, 그 때의 추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이른바 '전망'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경제학에서 많이 쓰는 가정 가운데 하나로 '다른 조건은 일정하다'라는 것이다. 전망하는 시점에 경제를 둘러싼 환경, 혹은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환경이 해당 기간 내내 변동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요즘처럼 초고속 사회에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감히 그런 가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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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과천의 기획재정부 기자들은 한차례 몸살을 앓았다. 경제상황이 안좋아 모두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판국인데, 국제통화기금(IMF)가 우리 경제 전망을 큰 폭으로 수정한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다. 생산적이지 못한 경쟁이지만 나름 생산적이었던지, 그럴듯한 숫자들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IMF는 지난해 11월 한국 경제가 올해 2%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그 숫자가 '마이너스'로 '돌변'할 것이라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그러더니 곳 -2% 정도라는 숫자도 다시 나왔다. 그 치열한 숫자 맞추기 싸움이라니...
죽을 맛은 경기에 '군불'을 지피기 위한 묘안 개발에 여념이 없어야 할 공직사회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주말을 '숫자를 내놓으라'는 기자들 등쌀(?)에 '탕진'했다는 하소연도 들렸다. 그러더니 급기야 손을 들었다. IMF의 그 숫자들은 원래 3일 10시를 기해 나와야 했으나, 기획재정부가 이를 하루 전에 털어놓았다. 3일 정해진 시간까지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숫자는 최악이었다. -4%. 올해 우리 경제가 4% 위축된다는 전망이었다. 그 누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여서, '억' 소리가 나지 않고서는 베기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이 숫자는 불과 두달여전에 내놓은 숫자보다 6% 포인트 차이가 났다. 경제성장 전망을 이렇게 크게 수정한 것은 내 생전 처음 보았다.
동물적 감각이 더해져 생산됐을 지도 모를 그 숫자를 놓고, 기자들은 '하이에나' 처럼 요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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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숫자에 몰입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이런 추세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는다. 세상사가 하도 복잡하니, 이해할 시간도 없고, 공들여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일게다.
숫자는 단순해서 좋다. 그것처럼 이해하기 쉽고, 또 기억하기 쉬운게 어디있단 말인가? 숫자만 남고, 그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쉽게 잊혀져 간다. 의미를 아예 찾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다 보면 숫자만 남고, 논리는 사라진다.
그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숫자는 누군가의 '동물적 본능'에 의한 손장난이 더해졌을 수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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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과 같은 경제상황에서 숫자는 '경각심'인 것 같다. 정신이 번뜩 들게 하는 데 숫자 만큼 좋은 도구도 없다.
한국 경제를 크게 부정적으로 보는 수치를 우리 정부가 달가워할 리 없다. 그래도 그 숫자가 주는 경각심만은 놓치고 싶지 않을 게다. 경제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이익은 당분간 제쳐두고 '일사불란'하게 경기 활성화를 위해 움직여주길 희망할 게다.
하지만 그 희망이 정책 실행의 중요한 정류소인 '여의도'에 닿기 전에, 부작용 먼저 낳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 '공짜 점심'은 없는 셈이니...
경각심을 심어주는 데 좋은 도구는 공포를 심어주는 데도 구실을 톡톡히 한다. 대다수의 소비자들이 그 숫자에 질려 호주머니를 먼저 닫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정부도 IMF 전망치에서 내년 성장를을 극구 앞으로 이끌어 내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4.2% 성장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모두들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렇게 미래를 예단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 놀음이엇다면 애초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상책'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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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04년 SBS로 둥지를 옮긴 한주한 기자는 현재 경제부에서 기획재정부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오랜기간 '서울디지털포럼' 핵심 실무진으로 일하기도 했던 한기자는 폭넓은 산업분야 취재 경험과 함께 미국 위스콘신대 석사학위를 받은 경제통입니다. 한국경제의 위기상황을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수준높은 분석기사가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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