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국제

지구가 멈추는 날 - 허술한 블록버스터

남상석

입력 : 2008.12.24 09:38


지구가 멈추는 날(감독: 스콧 데릭슨, 주연: 키아누 리브스, 제니퍼 코넬리, 12세 관람가) 

(* 영화 줄거리와 결말 부분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 한 내용(스포일러)이 있을 수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량으로 쏟아 붓는 광고와 여기저기 노출되는 예고편을 보고 오랜만에 볼거리 많은 블록버스터이겠구나 하는 설렘으로 시사회 상영관에 들어섰다가 낭패를 겪고 나왔습니다. 예고편만 보자면 달리는 트럭이 순식간에 가루로 변하고 거대한 로봇이 무인 전투기를 무력화 시키고, 주인공이 전지전능한 염력을 펼쳐 보여  "연말에 딱 한편 골라본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굉장한 볼거리를 갖췄겠구나!" 생각하게 만들지만 영화를 보신다면 여러모로 실망을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951년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동명의 SF 영화를 리메이크 한 건데요. 당시 2차 대전과 동서 냉전 등으로 얼룩진 세계의 혼돈에 경종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죠. 이게 리메이크에서는 전쟁 플러스 지구 온난화 등 인간이 지구와 지구에 사는 다른 생명체들을 위협하는 포괄적인 행동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클라투(키아누 리브스)라는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의 등장 장면, 비행접시를 업그레이드한 외계 비행체인 '스피어'의 모습, '고트'라 불리는 거대 로봇, 고트에서 변신해 나오는 나노봇 등 영화는 분명 흥미로운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액션 스펙터클 영화로서의 제 역할을 충실히 못하는 것이 초반에 몇몇 흥미로운 장면을 깔아놓아 클라이맥스에 뭔가 대단한 걸 보여주겠거니 기대하게 만들다가 거기서 그냥 그치는 바람에 맥이 빠져 버립니다. 키아누 리브스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와 비슷한 이미지로 나오지만 네오를 능가하는 새로운 모습은 아닙니다. 오히려 네오의 이미지를 갉아먹으며 슬쩍 편승하려 했다는 의도가 농후하게 느껴집니다.

신비의 연고제와 초능력을 이용해 방금 자기가 죽인 사람을 곧바로 살려내는 신공은 앉은뱅이 벌떡 일으키기 밖에 못하는 유능한 사이비 종교 교주를 머쓱하게 만들고 거짓말 탐지기와 경호원들이 착용한 무전기 등 각종 기기를 무력화시키는 전자기적 교란 능력은 전기뱀장어가 '형님'하고 엎드릴만한 수준이지만 관객을 감동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런 능력을 지닌 클라투가 효율적인 이동수단 찾을 노력은 안 하고 계속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만 하고, 클라투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당국에 신고까지 한 여주인공의 양아들이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떨어질 뻔 하는 순간 클라투가 자기 손을 잡아주었다고 감동 먹고 180도 마음이 바뀐다는 설정도 유치찬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인데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의 행위가 위험수위에 달했으니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켜야겠다.'는 결정 과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먼저 파견되었던 외계인(중국인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이 클라투에게 상황을 브리핑하는데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색하고   이 노인은 70년간 관찰한 결과 인간은 가망없는 족속들이니 멸종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며 그래도 자기는 미운 정 고운 정 들었으니 인간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또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없이 추상적인 수준에서  그냥 인간들이 행하는 나쁜 짓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로만 떠들어대니, 죄형법정주의 까지는 아니더라도 당하는 인간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억울할 노릇으로 만들더군요. 클라투는 외계인들의 집단의사를 전달하고 실행하는 에이전트 역할일 텐데 유엔 연설을 요구하는 등 처음엔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을 해보지만 한번 거부당하자 흐지부지 하고, 클라투를 설득해 인간 멸종을 막아보겠다고 나서는 여주인공은 클라투의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하는 것밖에 없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클라투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마음을 바꾸고 파괴를 막겠다고 나서니 이 어찌 어색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다. 피신한 대통령을 대신해 모든 명령을 집행하는 미 국방장관은 외계인의 위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합리적인 판단이나 명령을 주저하고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신선한 볼거리로 꼽을 수 있는, 나노봇이 달리는 트레일러와 스타디움을 순식간에 갉아먹는 장면을 보자면 제목을 '지구 특정부위를 갉아먹다 만 날'로 해야 할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