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마치기 전에 영국에서 썼던 글이다. 좀 늦었지만 올려본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썼던 글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월간 독자 Reader에 실렸다.

<둘째 은형이의 영국 너서리 졸업식. 졸업모자는 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지난해 여름, 해외연수 기회를 얻어 가족과 함께 영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당시 만 여덟 살, 세 살이었던 딸 은우와 은형이의 적응 문제였다. 한 나라 안에서도 이사하거나 학교를 옮기는 것은 아이들한테 큰 스트레스라고 하는데, 하물며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 낯선 학교에 갑자기 다니게 됐으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할까. 그나마 연수가 결정된 뒤 영어 학원을 몇 달 다닌 은우는 알파벳과 쉬운 단어 몇 개는 익혔지만, 둘째 은형이는 영어는커녕 한국어도 아직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영국에 온 지 10개월이 지난 지금, 걱정한 것에 비하면 아이들이 잘 적응해준 것 같아 고맙다. 며칠 전 은우가 다니는 영국 초등학교의 발표회를 다녀왔다. 지난 학기 동안 무슨 공부를 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학급 어린이들이 나와 발표하는 자리였다. 은우를 비롯해 필리핀에서 온 줄리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키아나, 이렇게 외국에서 온 친구들을 소개하는 순서도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 덕분에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는 설명과 함께 각 나라 말을 따라 해 보는 순서가 이어졌다.
한국어로 숫자 1부터 10까지, 은우가 먼저 읽으면 반 아이들이 따라 읽는 소리가 학교 강당에 메아리 쳤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은우네 반 아이들은 은우가 가르쳐주는 대로 한국어로 숫자 읽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간단한 말이긴 하지만, 그동안 낯선 곳에서 영어 배우느라 고생한 은우가 거꾸로 한국말을 친구들에게 가르쳐 준 셈이다. 영국인 선생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고, 덕분에 은우가 더 쉽게 영국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구나 싶었다.

<은형이와 조 선생님>
'너서리'로 불리는 영국 어린이집에 다니는 은형이한테도 고마운 선생님이 있다. 이 너서리에 동양 아이라고는 은형이 밖에 없다. 말도 안 통하고 자기하고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밖에 없는 너서리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처음 몇 주간은 은형이를 너서리에 데려다 주고 나오는 게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엄마, 가지 마!' '가지 마!' 하고 서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문 밖까지 따라나왔다. 은형이의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던지, 한국에서 대소변을 다 가리고 왔던 아이가 다시 기저귀를 차게 되는 '퇴행'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래도 매일 아침 서럽게 우는 은형이를 꼭 안아서 달래주는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Jo)'라는 이름의, 넉넉한 인상의 영국인 아줌마 선생님이었다. 죠 선생님은 '내가 한국말을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은형이와 소통할 수 있게 'Good girl!'과 'toilet'에 해당하는 한국말을 알려달라고 했다. 'Hwajangshil(화장실)', 'Ah, yeppeuda(아, 예쁘다)' 'Ah, Chackada(아, 착하다)' 이렇게 몇 마디를 소리 나는 대로 알파벳으로 적어드렸다. 선생님은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며 웃었다.
몇 주 뒤, 은형이를 데리러 너서리에 갔다가 조 선생님이 은형이한테 '아, 예쁘다!' 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걸 들었다. 약간 어색한 발음이긴 했지만, '아, 예쁘다'가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들리는지. 은형이가 배시시 웃는 걸 보고는 마음이 푹 놓였다. 조 선생님은 '은형이는 내 한국어 선생님'이라면서, '제대로 발음 못하면 은형이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고 했다.
이 때쯤부터 은형이는 아침에 나와 헤어질 때 조 선생님한테 안겨서 '바이바이!'하고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조금 더 지나자 은형이는 휴일에도 조 선생님 보러 학교 가고 싶다고 할 정도로 정을 붙였다. 간혹 아침에 늦잠 자고 가기 싫다고 꾀를 부리는 날에는 '조 선생님 보러 가자' 하면 해결됐다.
은형이가 영국 와서 다시 찬 기저귀를 졸업하게 된 것도 조 선생님 덕분이었다. 조 선생님은 '은형이를 믿어보자'면서 기저귀 말고 팬티를 입혀 보내라고 했다. 오줌 몇 번 싸도 괜찮다면서. 다시 시작한 배변 훈련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엔 이틀 건너 한 번씩 팬티를 적시고 왔지만, 점점 실수하는 횟수가 줄어갔다. 조 선생님은 '은형이가 자랑스럽다'며 흐뭇해했다. '아, 예쁘다!' 칭찬이 늘었음은 물론이다.
학기가 바뀌면서 은형이는 조금 더 나이 많은 아이들이 다니는 반으로 옮겼다. 그 동안 너서리 분위기에 익숙해진 덕분에 은형이는 새로 옮긴 반에서도 잘 지낸다. 하지만 은형이 표정이 가장 밝을 때는 옆 반의 조 선생님과 마주치는 때다. 이제 은형이는 간단한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조 선생님은 은형이에게 '아, 예쁘다!' 한다. 조 선생님은 은형이와 또래인 아들한테도 '아, 예쁘다!'라는 말을 가르쳐줬다고 했다.
이제 한국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름 방학 끝난 뒤에 한국에 돌아가게 된다고 하니 조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다음 학기에는 다시 은형이를 가르칠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가면 어떻게 하느냐. 허락할 수 없다'며 섭섭해 했다. 아직 많이 어린 은형이는 한국에 가면 곧 조 선생님을 잊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보다 더 자주 은형이에게 '아, 예쁘다!'라고 칭찬해 준 영국 선생님을. 앞으로는 내가 은형이한테 '아, 예쁘다!'를 많이 해 줘야겠다. 영국에서 만난 고마운 선생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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