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뉴스 > 국제

순정만화, 매직아워 - 11월 마지막주 개봉영화

남상석

입력 : 2008.11.26 14:41|수정 : 2008.11.27 10:52


몸도 춥고 마음도 춥습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극장가에는 기대작, 관심작 등 볼만한 국내외 영화들이 많이 개봉됩니다. 젊은 관객층을 노리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남성 관객을 위한 블록버스터 판타지, 어린이와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등이 이제 줄줄이 선보입니다. 다소나마 추위를 녹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정만화(감독: 류장하, 주연: 유지태, 이연희, 채정안, 강인, 12세 관람가)

 

강풀의 원작 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인터넷에서 올리는 작품마다 놀라운 조회 수를 기록하며 장편 연재만화의 영역을 개척하고, 지금은 [괴물2]의 시나리오를 쓰는 등 영화 분야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강풀의 작품 [아파트], [바보]에 이어 세 번째 영화화인데요. 셋 가운데 가장 영화화가 잘 된 것 같습니다. 최악의 영화화는 [아파트]였다는 점은 원작자 본인도 동의하더군요.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리면서 영화적 상상력을 적절하게 가미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는데요.

강렬한 사건보다는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감성과 일상의 소소함을 잘 버무려 마음 따뜻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원작 만화에서는 독백을 통한 인물들의 자세한 심리묘사가 큰 힘을 발휘했는데, 영화에서는 독백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면서 영화적 표현으로 변주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마치 '야쿠르트가 꿈꾸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이 원작처럼 착하디착한 성격인데 얼핏 보면 지루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고 착하니까 ‘나도 저런 마음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지’하는 향수를 자극하더군요.

 유지태와 이연희 커플의 사랑이야기는 남들이 보면 원조교제라 오해할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도저히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순수함과 착함, 그리고 영리한 배우 유지태의 연기  때문에 공감하게 됩니다. 

많고 긴 원작의 에피소드를 사장시키지 않겠다는 욕심이 과한 탓인지 나열되는 각 에피소드간의 유기적 연결이 좀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중반에 좀 길고 지루하다는 인상이 듭니다. (가장 활력이 넘치는 부분은 비슷한 또래인 강인이 이연희와 그 친구와 '공익소년'하며 부딪히는 장면이더군요.) 

캐스팅도 적합하고 연기도 무난한데요.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채정안은 물론 아이돌가수 출신 강인의 연기도 괜찮습니다. 채정안의 경우 얼굴이 많이 바뀌어 첨엔 잘 못 알아볼 정도이던데 개인적으로 바꾸기 전 모습이 더 개성 있고 매력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시사때 강인 팬클럽 회원들이 기자님들 출출하실텐데 드시라고 예쁘게 포장한 떡과 캔커피를 돌리더군요. 아이돌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에 몰려와서 꺅꺅 거리는 건 많이 봤어도 팬클럽이 언론을 상대로 이렇게 ‘뭘 멕이는’ 경우는 첨 봤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

매직 아워(감독: 미타니 고우키, 주연: 쓰마부키 사토시, 아야세 하루카, 12세 관람가)

 

미타니 고우키라는 이름은 1997년 아무 생각 없이 빌려온 비디오를 보다가 엄청 재미있게 봤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매직 아워]가 그의 연출작이라고 하기에 자료 검색을 해봤더니 영화는 물론, 드라마, 연극 분야에서 주옥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극작가이더군요. 요즘 대학로에서는 그가 쓴 [웃음의 대학]이라는 연극이 황정민, 송영창 출연으로 공연 중인데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두목의 여자 마리(후카츠 에리)를 건드리다 발각된 빙고(쓰마부키 사토시)는 두목으로부터 전설의 킬러 데라 토가시를 데려오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무도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는 점에 착안해 명배우를 꿈꾸지만 엑스트라 전문배우만 하고 있는 무라타(사토 고이치)를 꼬셔다 100% 애드리브 영화를 찍는다고 속여 두목에게 데려다 줍니다. 이것이 진정 영화 촬영이라고 착각한 무라타는 혼신을 다해 연기하고 두목이하 패거리들은 잘도 속아 넘어가는데 빙고 입장에서는 한 장면 한 장면 촬영(?)하는 게 죽을 맛입니다.

 끝까지 ‘이건 영화다.’라고 믿고 혼신의 연기를 다하는 무라타의 순진함과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조폭 패거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재미있고, 막판에 그 설정을 역이용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도 기발합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도 전혀 엉키지 않고 깔끔하게 갈무리하고 착상의 기발함을 엔딩장면까지 밀고나가는 추진력이 탁월한데요. 생각 없는 웃음만 전해주는게 아니라 인생의 교훈까지 살짝 얹어주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감독: 신동일, 주연: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18세 관람가)

 

요리사인 재문(박희순)은 미용사인 지숙(홍소희)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잘 나가는 외환딜러 예준(장현성)과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다가 지숙이 해외 출장간 사이 두 남자가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재문은 교도소에 들어가고 예준은 재문을 대신해 지숙을 돌봐주다가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요렇게 말씀드리면 [사랑과 전쟁]류의 치정극 아니냐 하실 텐데 겉모습은 그렇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성장배경과 환경, 사회적 위치가 다른 두 남자의 관계가 영화의 핵심입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됐는가? 바로 군대시절에 선임병과 후임병으로 만났고 운동권 학생이었던 선임병 예준은 재문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한 거"라며 둘이 있을 때는 말을 놓으라고 하고 재문에게 ‘철학에세이’같은 책을 읽히며 ‘의식화' 투쟁을 시도한 거죠. 1987년에 대학에 들어가 386세대에 속하는 감독이 자신을 포함한 386세대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 형식이라고 합니다.

 신동일 감독은 이전 작품 [방문자들]에서 세상과 단절된 자의식 넘치는 대학 강사와 모 종교를 전파하는 젊은 전도사 이야기에 병역거부라는 소재를 가미해 독특한 시선을 보여주더니 이번 작품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통찰을 담아냅니다.

 한때는 운동권에 몸담으며 '민중'을 위해 헌신하다가 그 좋은 머리로 지금은 자본주의의 첨병인 외환 딜러로 활약하며 존경과 부를 얻은 예준, 잠재의식 속에 자리한 일말의 죄의식을 바쁜 시간을 쪼개 이민을 준비하는 재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경제적 지원을 베푸는 행위로 씻어보려 합니다. 겉으로는 평등한 친구 관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의 상하관계로 예준은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는 건데 그 위선을 무리하게 밀고나가다가 결국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소위 '먹물'들의 위악을 은근하지만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통속적인 패륜 치정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 보는 재미를 고민한 흔적이 보이고 영화라는 매체로 이런 부분을 다루는 시도가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부여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콰이어트 맨(감독: 프랭크 A. 카펠로, 주연: 크리스찬 슬레이터, 엘리샤 쿠스버트, 15세 관람가)

왕년에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어느덧 40줄에 접어들어 앞머리가 거의 벗겨진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장 내 왕따인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와 동료들을  증오하며 총기 난동을 꿈꾸다가 비슷한 짓을 직접 실행에 옮긴 동료를 제압해 일거에 영웅이 되고 또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미모의 여비서의 사랑까지 얻는다는 이야기인데 막판에 중요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어 쉬운 업무도 제대로 못해내고 실수를 연발하거나 상사에게 질책을 넘어 놀림 받고, 아무도 놀아줄 사람이 없어 공터에서 혼자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모습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글같은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많은 직장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잘 표현하는 대목이더군요. -.-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