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색깔 논쟁이 급기야 이 지경으로까지 흘러왔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과서 수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요즘 새 정부의 교육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봉역을 자처하는 듯한 서울시교육청은 아예 역사를 직접 가르치겠다고 나섰습니다.
'현재 나온 근현대사 교과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새빨간지 알려주마?'
최근까지 서울시교육청은 관할 고교 교장들과 학교운영위원들을 불러 모아 이른바 '교과서 연수'를 실시했습니다. 현재 나온 근현대사 교과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새빨간지를 특별 교육시키고 이미 다 끝난 교과서 선택을 '다시 하라'고 지도하는 자리였죠. 각 학교의 교과서 선택은 그 학교 운영위원들이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제도와 절차는 한낱 구호로 무시돼버린 것입니다.
그러더니 한술 더떠서 이번에는 '현대사 특강'이라는 이름 아래 특별한 강사진을 꾸려 학생들에게 현대사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하겠답니다. 역사 교육이 부족하다 생각되면 교과 과정을 개편해서, 아니면 당장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서 역사 교사들을 통해 교육을 강화하면 되는데 왜 엉뚱한 사람들이 나섭니까? 한마디로 지금의 역사 교과서, 또 역사 강의가 못미더워 특별한 분들이 보충 수업을 해야된다는 논리 아닌가요? 그러면 교육당국이 지난 10년 내내 그 교과서, 그 교사들로 역사를 가르쳐오다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심각한 불신에 빠졌을까요? 정권이 바뀌니까 그 사회의 역사관도 바껴야된다, 뭐 이런 논리인가요?
교통 전문 경찰관, 수녀, 어리이집 원장 등...선발 절차도 갸우뚱한 '현대사 특강 강사'
이번 '현대사 특강'을 위해 강사로 선발된 분들을 보면 솔직히 기가 막힙니다. 전원 다 사학이나 역사 교육과는 무관한 분들인 것은 물론 교통지도 전문 경찰관, 피부과 의사, 수녀, 어린이집 원장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분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과 평소의 깊은 통찰을 통해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한 많은 내용을 갖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현대사라는 특정 분야에서 이 분들이 전문가인 역사 교사보다 더 정통하고 바람직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도저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선발 절차와 과정 자체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이번에 구성된 강사 풀은 모두 145명인데요, 1차로 공모했을 때 78명 밖에 지원자가 없어 일주일 공모 기간을 연장했는데도 2차 공모에서 81명만 지원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교육청이 나서서 강사 풀의 숫자를 겨우 채웠습니다. 특히 1차 공모에서 추천된 76명은 이번 특강을 주도한 김진성 서울시 의원과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두 사람이 추천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현재의 역사 교과서들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직접 교과서를 썼다가 오히려 지나친 편향성으로 탈락했던 교과서 포럼 공동 대표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와 차상철 충남대 교수, 또 김구 선생을 테러범이라고 표현해 물의를 일으켰던 류석춘 교수 등 보수 성향 인사 위주로 구성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면면이 이럴진대 이번 현대사 특강이 대단히 우편향적으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김구 선생 테러범 표현 물의 교수도 현대사 특강 강사로 선발'
강사 선정 기준도 모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번 강사 선정위원은 전현직 교장 8명으로 구성됐다고 알려졌는데요,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서울시교육청이 절대 밝힐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들 강사 선정위원들이 추전된 강사 후보의 경력을 고려해서 판단하고 논의해 특별한 반대가 없으면 강사 풀에 넣었다는 설명입니다. 전적으로 위원들의 자의적 판단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선정 기준과 요건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강의 내용에 대한 관리도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강사들이 어떤 주제나 내용으로 강의할 지 모른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과 국가관 정립, 바른 가치관 형성과 관련된 내용이면 된다는 설명입니다. '가치관', '국가관' 등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얼마나 광범위하고 모호한 개념입니까. 게다가 사전 관리도 없으니 강사들이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믿는다면 일본 식민지 침탈은 우리 근대화의 중요한 계기이고 김구 선생은 테러범일 뿐이라고 가르쳐도 아무런 막을 방법이 없겠군요. 아니, 이름만 '현대사 특강'이지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한 주제라면 무엇이나 허용되는 '잡탕식 교양 강좌'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시내 302개 고교에서 27일부터 겨울방학 전까지 학교당 두 차례씩 특강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서울시 의회는 학교당 100만원씩 지원될 수 있도록 3억여원을 추경 예산에 책정한 상태입니다. 문론 이 예산 책정을 주도한 사람도 김진성 서울시의원입니다. 미증유의 불경기로 학교들이 난방비를 아끼고, 방학 때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학생이 부지기수인데 정체불명의 '교양 강좌'에 수억원대의 예산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에게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룬 각계각층 인사들의 다양한 경험과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 통찰을 들려주고 가르치는 것은 소중한 시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육은 그런 종류의 기회가 부족하다는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당연히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면서 호들갑을 부리면서 보수적 시각을 대변하는 인사들이 일방적으로 그런 이념을 선전하고 강요하는 교육은 바람직하다는 것인지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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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보도국의 신사'로 불리는 우상욱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사회, 정치,경제부를 두루 거치며 지금은 사회1부의 교육담당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성실한 취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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