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이 오랜만에 등장했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의 북측 단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군사회담장인 판문점이 아닌 개성에 나타났다.
김영철 중장은 11월 6일 오전 박림수 대좌 등 군관 4명과 함께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명목은 개성공업지구 '실태 료해'였다고 한다.
전날 밤 사전 통보를 했다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남북 관계가 꼬여 있는데다 남측 민간단체들의 전단, 즉 삐라 살포로 개성공단에 공장을 둔 기업인들이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다.
앞서 대령급 군사실무 회담과 중령급 접촉을 통해 북측이 '전단 살포를 중단하지 않으면 개성공단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터라 북한 군부 인사들의 출현에 개성공단에 냉기가 흘렀을 것이다.
김영철 중장(남측 계급으로는 별 둘, 즉 소장급이다)은 자신을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으로 소개했다.
그런 직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 접했지만 장성급 회담 남측 대표를 국방부 정책기획관이 맡고 있는데 견주어 금방 이해가 됐다.
그보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타이틀과 맞물려 뭔가 북측 최고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 아닌가 추측될 뿐이었다.
김영철의 말투 등 '무게감'이 남북회담에서도 입증된데다 총은 안들었다 해도 인민군복 차림이었으니 분위기가 어땠을까?
"짐 빼려면 얼마나 걸리나?"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위협적이었다.
오전에 공장 11곳을 둘러봤는데 가는 곳마다 "짐 빼려면 얼마 걸리냐"고 툭툭 물었다고 한다.
또, 자기들끼리 대화하며 '개성공단 철수'를 암시하는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짐을 빼라니...여기에 투자한 게 얼마인데 보따리를 싸라는 말인가? 공장을 뜯어갈 수도 없고..'
남측 기업인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원래 외국인 직접투자가 그렇듯이 처음 들어갈 때는 투자를 하는 쪽이 받아들이는 쪽보다 큰 소리도 치고 우위에 있는 것 같지만, 투자를 하면 할 수록 그 지위는 역전된다.
투자액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발을 뺄래야 뺄수도 없고, 투자를 받아 준 국가는 '어디 갈테면 가보라'는 식으로 배짱이 두둑해지는 것이다.
물론,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일자리'라는 중요한 변수가 남아있기는 하다. 김영철 일행은 '실태 료해'답게 실무적인 모습도 보였다.
시찰에 동행했던 문무홍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장은 이들이 투자금액과 등록금(자본금), 근로자 숫자, 근로환경, 임금 등에 대해서 파악하고 오후에는 정수장 같은 기반 시설을 둘러봤다고 전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같은 날인 6일 오전 10시 반 서울 세종로의 통일부.
정례 브리핑이 시작되자마자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이 전날 임진각에서 있었던 민간 단체의 전단 살포에 대해 강도높게 유감을 표명한다.(*기자는 국방부를 담당하므로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취재 화면을 통해 확인한 당시 상황이다.
"정부는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서 관련 단체들에게 동안 남북간 합의 정신이라든가 현재의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에 북 전단살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제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정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단을 살포한 데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전단 살포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대변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똑같은 내용을 한 차례 더 되풀이해 읽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면, 정부는 수 차례에 걸쳐서 관련단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급박하길래 같은 내용을 되풀이까지 했을까?
되돌아 보면 이런 유감 표명은 민간단체뿐 아니라 - 아니 그보다는 -북쪽, 개성을 향한 메시지였던 것 같다.
같은 시간 북한 군부의 실태조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일부 대변인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심리전인가 고민의 일단인가?
다시 개성으로 가보자.
북측 군부의 시찰은 "심리전적 차원이 명백"하다는 게 남측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공단 '실태 료해'라면 경제 관련 기관이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군인들이 나타난 것은 심리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현장에 있었던 남측 관계자는 북한 군부 인사들이 전자부품 생산업체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 부품은 뭐고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반면 섬유 공장은 별로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노동집약적 산업보다는 기술집약적 산업이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1단계 사업진척이 잘 안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졌다고 한다.
"짐 빼는데 얼마나 걸리냐"면서 관심은 또 무슨 관심을 보였다는 말인가?
이런 행태는 개성공단이 북한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체제에 부담이 되는 것인지 군부가 실질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진지한 뜻이 있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개성공단의 운명은?
"북측이 개성공단에 대해 강경조치를 취하기가 곤란한 구조입니다." 한 관계자의 진단이다.
3만 6천명에 이르는 북측 근로자의 생계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투자가 진행될 수록 투자자의 발이 묶이기도 하지만 반면 노동자들의 일자리 창출 문제가 남쪽 만큼이나 북쪽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행위들이 쌓여서 하나의 구조(structure)가 형성된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구조는 '협력적'이다. 어느 한 쪽이 발을 빼면 다른 한 쪽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더 손해인지 내가 더 손해인지 한 번 해보자'고 막가는 식으로 나간다면 개성공단은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잃게 될 3만 6천명의 북측 근로자들이 시위나 연좌농성을 벌어지는 못하겠지만, 경제적 손실에 더해 '꽤 괜찮은 일자리를 잃었다'는 상심이 클 것이다.
마지막 활로를 찾아 현지에 공장을 세운 남측 기업인들의 손실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오바마도 큰 변수다.
개성공단의 강제 철수, 강제 추방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일종의 '테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 어렵게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져나온 북한이 택하기가 어려운 카드라는 분석이다.
부시 행정부로부터 '악의 축'이라는 오명을 쓴 뒤 몇 년을 기다려 온 호기인데 악수를 두랴? 개성공단에 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낙관론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지들이 뭘 어쩌겠어?'라는 식의 낙관은 낙관이 아니다.
오바마 정권 탄생을 계기로 북미간 관계재정립을 모색하는 때 북한의 군관들이 개성에 나타난 이유를 새겨야 한다.
김영철이 나타나야 할 곳은 개성이 아닌 판문점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하고 있는 장성급 군사회담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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