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강호의 정통명가를 자처하는 보수방이 새롭게 떠오르는 역사교에 대한 집중 공격에 나섰다. 오랜 세월 보수방 최고의 무공으로 손꼽히며 경천동지할 위력으로 강호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색깔공은 여전히 강맹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역사교를 돕고 나선 두 문파가 있었으니 교육파와 국편회였다. 역사교는 두 문파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색깔공을 막아내고 보수방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 저자 주 : 다 아시겠지만 보수방은 보수 세력, 역사교는 역사교과서, 교육파는 교육부, 국편회는 국사편찬회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4년이 채 못갔다. 강호의 지존이 친보수방 인사로 바뀌면서 보수방은 권토중래, 역사교를 다시 위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실전된 줄 알았던 색깔공은 두 젊은 권법가, 조전 모 학사의 무대포掌, 정두 모 무사의 독설拳으로 업그레이드돼 정신없이 펼쳐졌다. 역사교를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든 일은 4년전 함께 싸웠던 교육파와 국편회가 보수방 편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지존이 바꼈다고 피아도 바꾸버린 두 파, 역사교는 이제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급기야 보수방은 교육파를 동원해 마지막 필살기를 꺼내 놓기로 했다. 교과서 수정 권고안. 사상 처음 펼쳐진다는 무공 앞에 역사교는 암담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 역사교의 마지막 기개를 보이고 장렬히 산화하겠다"면서 온몸의 내공을 최대 갑자로 끌어올리고 보수방과 교육파의 필살기에 맞섰는데…엥! 이게 뭐야. 한번 펼쳐지면 좌편향 천리가 초토화된다고 알려졌던 그 필살기가 눈 앞에서 보니 앙증맞은 주먹을 귀엽게 흔들어대며 여기 톡톡톡, 저기 톡톡톡 안마하는 수준인 것이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담은 장풍을 쏘기 위해 잔뜩 팔을 들어올렸던 역사교는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냥 정색하고 내지르자니 민망하고 거둬들이자니 그동안 받은 핍박으로 쌓인 분노가 삭지를 않고.
신성한 역사 교육의 문제를 통속적인 무협 소설에 빗대자니 경망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어제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를 들으면서 이런 스토리가 절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역사 교과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아니 이런 것 고치라고 그동안 좌편향이니, 북한 역사교과서 표절이니 그렇게 공격했나"라는 반응입니다.
몇가지 사례를 보면 쉽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금성출판사 144페이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에서 '이정표'를 '전환점'으로 바꿔라.(이정표나 전환점이나!)
260페이지 "1946년 수십만 명의 민중들은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의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폐지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에서 '쌀 공출'은 '미곡수집'으로 고쳐라.(쌀이 우표인가? 수집을 하게)
289페이지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토대가 되었다"에서 '민족민주운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수정해라.(무슨 차이인지 영~)
309페이지 '결국, 북한은 남한 정부가(후략)"에서 '결국'을 '이후'로 고쳐라.(후~)
법문사 241페이지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독립을 지키며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하여(후략)"에서 '아프리카 신생국가' 앞에 '일부'를 넣어라.
천재교육 274페이지 "1947년 7월에는 좌우 합작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하였다. 결국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선언하고(후략)"에서 '결국'을 빼라.
등등입니다.
55개 수정권고 가운데 대부분이 이런 첨삭 지도 수준으로 '문투'를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었고 나머지도 거의 모두 추상적이거나 애매한 내용 뿐입니다.
저는 교과부가 이런 수정 요구를 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있고 일정 부분 해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수정 요구를 그 난리를 벌이면서 법에 근거도 없는 기구와 절차를 만들어서 사회적으로 논쟁을 불러가며 해야 하나요? 그냥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각계의 의견을 모아 교과부의 주석을 달아 집필자들에게 조용히 요구하고 협의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정말 그 사소해보이는 55군데의 표현상 문제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우리 학생들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문제가 되는 근·현대사 교과서와 예전에 배우던 교과서를 모두 갖다 놓고 정독을 해봤더니 둘다 허용될 만한 표준편차 안에 있더구만."
사실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도 관점과 해석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날조하거나 왜곡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또 약간 그런 혐의가 있는 부분들은 역사 선생님들이 적절한 설명으로 보정을 해가면서 가르쳤구요. 거꾸로 지금 교과서도 일부 보수적 시각을 가진 분들에게는 매우 빨갛게 느껴지겠지만 근간에 흐르는 역사적 태도나 시각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설사 약간 오버한 부분이 있더라도 요즘의 조숙한 학생들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중에 나오는 책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여러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데, 교과서만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자체가 시대착오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수많은 갑론을박을 한낱 헤프닝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이 참에 교과서 국정 체제에 대한 명확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허용되는 자율성의 범위와 수정 등 운용 절차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법이 정한 절차 외의 방법으로 교과서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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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보도국의 신사'로 불리는 우상욱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사회, 정치,경제부를 두루 거치며 지금은 사회1부의 교육담당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성실한 취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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