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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박 반장] 삑싸리?

박병일

입력 : 2008.10.27 16:12


"삑싸리 났다"라는 말은 "삐끗하다, 실수하다, 어긋나다, 빗맞다"등의 뜻을 나타내는 무국적 은어입니다. 대개 당구를 할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은어라는 게 대개 그러하듯이 빗맞다 하는 것과는 다른 강한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골프에서는 한참 앞서가던 선수가 마지막 홀에서 OB를 내거나, 야구에서는 9회말 원아웃 만루 상황에서 안타 한방이면 뒤집을 수 있는 상황에서 타자가 투수 앞 땅 볼로 병살 상황을 만드는 경우 같이 극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결정적인 순간에 삐끗할 경우에 많이 쓰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 국회에서 기자들 또는 당직자들이 이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바른말 고운말을 써야 할 기자들이 이런 단어를 쓰면 안 되겠죠?) 바로 문화관광부에 대한 문방위 국정감사에서 발생한 상황 때문입니다. 이미 보도를 통해서 다 보셨겠지만, 방송장악 의혹을 놓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던 와중에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명박 휘하의 졸개'라고 발언한 것은 민주당에게는 첫 '삑싸리'였습니다.

8월 11일 언론관련 회의에 이어 8월 26일 불교관련 대책회의에도 국정원 간부가 참석한 배경을 놓고 국정원까지 동원된 방송장악 음모이자 정치사찰이라고 몰아붙이던 민주당에게는 분명 악재인 발언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이 즉각 대통령을 폄훼하는 막말이라며 사과를 요구하면서 국감까지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궁지에 몰리던 한나라당에게는 호재였습니다. 이종걸 의원의 '삑싸리'가 내심 고마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종걸 의원의 '삑싸리'는 금세 묻히고 말았습니다. 여당의원들이 이종걸 의원의 발언에 항의하면서 집단으로 퇴장하는 와중에 유인촌 문광부 장관이 취재중이던 카메라 기자에게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파행되면서 고흥길 위원장이 유 장관에게 다가갔는데, 유 장관이 야당 의원의 발언에 크게 격분한듯 고 위원장에게 따지듯 분통을 터뜨렸고 이를 취재하던 카메라 기자에게 "찍지마..XX, 성질나게.." 등등 막말을 퍼 부었던 겁니다. 이종걸 의원의 막말로 역전된 여야의 전세는 또다시 재역전됐습니다. 유 장관의 '삑싸리'가 민주당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호재였고, 한나라당에게는 원망스러운 악재였습니다.

이후, 유인촌 장관의 사퇴공방이 번졌습니다. 유 장관이 공식 사과하는 국면에 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여권에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냉철히 들여다보면, 이번 막말 파문 속에 본질이 숨어들어간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틀간 문방위 국정감사의 최대 이슈는 국정원 간부의 각종 대책회의 참석을 둘러싼 정치사찰 논란이었습니다. 야당이 이슈화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슈는 사라지고 장관의 사퇴논란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유 장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사퇴 공세는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여당은 이종걸 의원의 막말을 문제 삼으며 맞불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당일의 이슈였던 각종 대책회의에 국정원 간부의 참석문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한동안 유 장관 사퇴논란과 이 의원의 사과 논란 속에 당초 이슈는 부각되지 않을 듯 합니다.

'삑싸리'는 당구에서 쓰는 무국적 은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통상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 발생하는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야 모두 잔뜩 힘주고 정쟁을 벌이다가 발생한 일입니다. 종국적으로 냉철하게 문제점을 짚어나가려 하지 않고 제정신을 잃고 흥분하게 되면 발생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국회의원의 막말이나 국감장에서 장관의 막말은 분명 시정돼야 할 구태입니다. 후진 정치문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정치적 현안이나 문제점들을 바로 잡기위한 것임을 고려하면 국정감사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삑싸리'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도 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쯤 이런 구태를 보지 않게 될 수 있을까요?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