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 홍당무(감독: 이경미, 주연:공효진, 이종혁, 서우, 황우슬혜, 청소년 관람불가)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로 10억원 남짓의 저예산 영화입니다. 이경미 감독은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이었던 박 감독의 눈에 띄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를 거쳐 장편 데뷔작을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박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보다 코믹하고 대중적인 버전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모 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보니 이 감독이 박감독 작품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사이보그..]라더군요.
[미쓰 홍당무]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독특한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공효진이 연기한 주인공 양미숙은 남자는 물론 같은 여자들에게도 비호감 지수가 상당히 높은 인물입니다. 평범한 외모에 쓸데없이 예민하고 공격적인 성격이니 사교성은 제로에 가깝고 툭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까지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꾸는데도 젬병이어서 패션은 구닥다리이고 시집갈때 내집마련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집도 없이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니 동료 선생들은 물론 학생들까지 심각하게 그녀를 외면합니다.

이런 양미숙에게 떠오르는 사랑이 있었으니 그 남자는 바로 서선생(이종혁)으로 양선생이 학생시절 선생으로 수학여행때 잠시잠깐 선생으로서 보여줬던 따듯한 관심에 이어 동료 교사로 다시 만나 회식후 티코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팔을 어깨에 둘렀다고 자기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같은 과목인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이유리 선생(황우슬혜)과 급기야 삼각관계를 억지로(?) 만들더니 둘을 떼어놓기 위해 학생으로서 당당한 왕따인 서선생의 딸 종희(서우)와 든든한 동맹을 맺습니다. 종희 또한 양선생 못지않게 엉뚱한 4차원 소녀입니다.
이정도 이야기라면 기존의 관습대로라면 초중반 주인공이 고생하다가 막판에 숨겨진 매력이 발견되면서 주변의 인정도 받고 사랑도 얻는다는 식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예상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끝까지 비호감으로 끌고 나갑니다. 바로 이점이 이 영화의 새로운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파국으로 끌고가지도 않는데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선과 당황이 섞이게 되는 효과를 얻는 것 같습니다.
코미디의 상당부분은 독특한 성격의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에서 나옵니다. “니가 캔디냐? 다 너만 좋아하게...”부터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즐비한데요.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개그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할만한 부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러시아어를 통한 민망한 대사나 음란성 채팅에 개인정보 도용이 등장하는데 곰곰이 따져보면 엉뚱하고 기발하고 이리저리 튀어 당황스러운데 영화를 볼때는 워낙 코믹 코드가 강해 허허, 낄낄 웃으며 보게 됩니다. 이 엉뚱한 유머코드에 편승하지 못한다면 영화를 내내 불편하고 재미없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관습적이고 친절한 영화는 아니거든요. 이런 관객들을 배려해 조금만 더 다듬어졌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가장 도발적인 요소는 미성년자인 서우가 오히려 양 선생을 리드하며 상황을 주체적으로 전개해 간다는 점인데요. 이 부분과 음란채팅에 대한 이유리 선생의 반응 등은 남자 감독이 만들었다면 마초적 환타지라고 비난받을 만한데 감독이 여자이다보니 므흣한 상황이 되는군요.
이 불쌍하고 가련하지만 동정을 받을 여지는 별로 없어보이는 양미숙의 캐릭터가 후반부에 두세번쯤 관객과 감정이입이 되며 콧날이 찡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부분의 강도는 전적으로 관객의 처지나 경험에 좌우되는 것 같네요. 치열한 경쟁사회의 톱니바퀴에 물려 돌아가지만 언제 튕겨져나갈지 모르고 한번 튕겨져 나가면 다시 끼어들기 어렵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연료로 쓰며 버티는 분들, 또는 한 두번씩 이런 쓰라린 경험을 했거나 하는 중이라면 연대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짠한 마음은 들 것 같네요.
공효진은 감독이 창조한 독특한 인물을 창의적으로 수용해 보여줍니다. 이 배우는 이명세 감독의 [M] 시사회 인터뷰때 얼핏 느꼈었는데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신인 배우들도 기대 이상의 연기로 공효진과 호흡을 잘 맞춥니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은 시트콤이나 TV 미니시리즈, 또는 속편 영화로 만든다면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갈 정도로 개성있고 독특하고 강렬합니다.
*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극중에 까메오로 등장합니다. 봉 감독은 대사까지 있는 비중있는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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