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 전 퇴임 후 처음으로 상경했습니다. 10·4 남북선언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오후 6시에 행사가 시작이었는데 5시도 안돼 행사장은 참여정부 고위 인사들을 비롯해 10·4 남북 정상회담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낯익은 인사들로 무척 붐볐습니다. 행사 참여 인원은 5백 명이 넘었죠. 접견실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엄혹한 시기에 잘 살고 있냐"는 인사 아닌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윽고 노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행사보다 여러분을 만난 것이 더 반갑다" 는 말로 노 전 대통령은 화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강연이었습니다. 예정시간을 20분 가량 넘긴 이날 강연에서는 노 전 대통령 특유의 날선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몇가지 말들은 하지 못했고 또 예정에 없던 몇가지 말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좀 늦은 탓에 방송을 비롯한 언론 매체에서 제대로 이런 저런 말들이 소개되지 못했는데요. 어떤 말이 있었는 지 볼까요?
- 하려다 못한 말...
노 전 대통령은 사전에 미리 배포한 자료에 쓴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실제 강연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행사 주최측에서 발언 수위가 너무 강하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라고 노 전 대통령은 밝혔는데요.. 어떤 말이었냐하면...
"2007. 10·4. 선언은 이념적, 정치적 성격은 거의 없고 실용적, 실무적 내용으로 된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선언을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남북관계가 다시 막혀버렸습니다. 관계를 복원하는데 많은 시간과 부담이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관계 복원을 위해 허겁지겁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모습이 좀 초조해 보입니다. 그야말로 '자존심 상하게' '퍼주고' '끌려 다니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자존심 상하고, 퍼주고, 끌려 다닌다, 이런 비난은 지난 10년간 한나라당의 전매 특허였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결과로서 신뢰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은 다음의 말로 대신했습니다.
"10·4 선언이 지금 좀 잘 안굴러 가고 있습니다. 전임사장이 계약을 하면 후임 사장은 이행을 하는 것이 회사 CEO들은 다 그리 하길래 나는 그리되는 줄 알았어요. 회사에서는 그리 안하면 부도나거든요. 국가 CEO는 안그래도 되는 줄 미처 몰랐어요. 이것은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원래 준비했던 글은 다소간 현 정부 여당과의 대립각이 서 있는 말이었습니다. 나중에 했던 노 전 대통령의 말도 어느 정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꼰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전면적인 대여 비판의 성격은 다소 약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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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말도 대통령은 좀 피해갔죠. 국가주의를 언급하며 노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가주의 사고라는 것을 약간 언급했습니다. 지금 가치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체계입니다. 국가간이건 남북간이건 그와 같은 사고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한마디 끼워 넣었습니다. 유인물 참고해 주십시요."
하지만 원래 원고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국가주의 사고를 넘어서자. 앞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국가관을 그대로 따르면, 국가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자고 말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럽에서는 유럽의 통합을 위해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국가 주권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사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심으로 통합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사고를 해야 합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주권의 일부를 양도할 수도 있고, 양보가 항복도 이적행위도 아니라는 인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평화통일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통합을 하려고 한다면 진정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국가주의 사고를 넘어서야 합니다."
원래 준비했던 글은 잘 살펴보면 다소간의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일부를 북에 양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만 한반도의 통일 국가를 이루기 위해 어떤 주권의 일부를 북에 양도하자는 것이 반역이나 이적행위일 수 없다는 말인데요. 이 역시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논란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 준비없이 했던 말...
그런가 하면 노 전 대통령은 애초에 원고에 없던 말도 했는데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죠.
"대북 퍼주기, 실제로 정책을 하는 분들은 논리적으로 토론하고 반박하고 넘어서는데 이 말나오면 못 넘어서요. 통일부 공무원들도. 왜 퍼주냐 그러면 뒷걸음질치고 자존심없냐고 하면.. 신문에 그거 나오면 쥐약이에요. 본때 보이고 싶죠. 근데 그건 대화나 협상하는 자세가 아니거든요. 그것도 큰집에서... 인구도 우리가 많고.. 돈도 우리가 많고.. 그런 큰 집다운 자세를 가지고 가야될 쪽에서 상호주의는 대결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반공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이른바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 관한 대목입니다.
"실용주의란 말을 아무 비판없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시는 언론들이 있어요. 이걸 가려내는 것은 언론밖에 없어요. 언론과 국민밖에 없고. 정파적으로는 각기 자기들이.. 실용주의란 말이 매력있는 말입니다. 국민들한테 호의적으로 들리고 인기있는 말이기 때문에 서로 쓰려고 하죠."
그리고 다음의 말로 강연을 매듭지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여러가지 얘기들을 했습니다만 바탕은 우리의 사고가 분단이 시작될 때의 사고 분단체제 반공주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데서 대북정책의 제자리 걸음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큰 틀에 있어서의 우리의 사고를 바꾸는 것이 대북 관계 발전에서 꼭 필요한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별 뾰족한 것 아닌데 말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말하지 않고 피해가려던 얘기들을 했습니다. 정면으로 이 문제들을 다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통일에 대한 진지하고 과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히 통일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만 반복해서는 현재의 남북 관계와 법적 테두리, 국민적인 합의 수준에서는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와 마찬가지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그리고 향후 언젠가는 이뤄야 할 통일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이있게 생각해 보긴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국정감사 자료에서는 청소년의 40% 이상이 통일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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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차디찬 세상이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김호선 기자는 2001년 공채로 입사해 지금은 정치부 정당팀에서 맹활약 중입니다. 회식 자리에선 재치있는 성대모사로 동료들을 웃기는 김 기자는 모닝와이드 '국제뉴스'로 시청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사회부 시절에는 명문 사립대들의 '내신 무시' 입시 관행을 특종보도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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