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찾아 따라가는 짧은 생애' 프랑스 아를 생가에서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즈 우아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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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했던 천재 화가 반고흐. 그는 사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됐다. '격렬하게 고뇌'했던 삶의 흔적은 오늘날 예술의 '성지'가 됐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은 르부르 박물관과 함께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박물관이다. 오르세는 과거 기차역이었으나 기차가 현대식으로 변하면서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단연 화가 반고흐의 방이다.
빈센트 반고흐는 1953년 3월 30일 추운 북유럽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1년 전 태어난 형이 있었지만 수일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고흐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출생부터 남다른 사연을 가진 반고흐는 화가들의 이상적인 집단 생활을 꿈꾸며 남 프랑스 아를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고흐의 생가는 2차 대전 당시 파괴됐으나 다시 복원했다.
고흐는 오로지 예술만을 생각했고, 자신에게 엄격했지만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의 생전 딱 한 편의 그림이 팔렸는데, 이는 동생 테오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산 것이라고 한다. 생활이 너무 어려웠던 탓에 동생 테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매일 빈속에 음주를 하는 바람에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그의 작품 <밤의 카페>에 등장했던 실제 카페에서 그는 매일 바에 앉아 70-80도에 이르는 독주를 마셨다. 압생트라는 이 술은 알콜에 설탕과 식물성 향료(향쑥, 살구씨, 회향, 아니스)등을 섞어 만든 혼합주로 지금 그의 향수를 느끼고자 하는 이들이 찾고 있다.
고흐는 이곳에서 폴고갱을 만나 화가 공동생활의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고흐의 <아를의 여인>과 폴고갱의 <밤의 카페>는 두 사람이 한 날 한 시에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화가 공동체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고흐와 고갱은 절교를 했고, 이에 분노와 슬픔을 느낀 고흐는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사건 이후 고흐는 아를을 떠나 스스로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해 1년 간 치료를 받는다. 당시 정신과 치료는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삶이 워낙 고통스러웠던 고흐는 누구보다 잘 적응했다. 당시 고흐는 <낮잠>이라는 작품으로 안정된 휴식을 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1년 뒤 그는 오베르 쉬즈 우아즈라는 마을로 이동하고, 가장 가격이 싼 '라부 여인숙'에 짐을 풀어놓는다. 지금은 고흐의 흔적을 찾아온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명소가 됐지만, 고흐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70일 간 라부 여인숙에 머물면서, 72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아침에 고기 수프에 마른 빵을 먹는 것으로 하루 식사를 마쳤고 나머지 시간은 야외스케치를 하는데 집중했다.<오베르의 교회>, <가쉐박사의 초상화> 등은 그가 이곳에서 남긴 작품이다.
고흐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가쉐 박사는 한 때 그의 심리상태가 안정돼보인다고 진단했지만, 실제 고흐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마지막 작품(추정)으로 남기고 삶을 포기한다. 그는 밀밭에서 가슴에 총을 겨눈 뒤 여인숙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고흐는 자살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장례예식을 거절당했고, 영구차에 실리지도 못했다. 그는 짐수레에 실려 차가운 땅에 묻혔다. 라부 여인숙의 '고흐의 방'은 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자살한 사람의 방에는 손을 안대는 당시 사람들의 관습 때문이다.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평생동안 자신과 외로운 투쟁을 했던 그의 고뇌를 다소 엿볼 수 있다.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성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사람은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자료제공=SBS줌인!세계로떠나자, 편집=인터넷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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