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수능 원점수 공개 파문이군요.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국회 상임위에 출석해 정책 질의를 받는 과정에 갑자기 불거졌습니다.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이 "수능 원점수를 달라"고 요구하자 안 장관이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걸 전제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죠. 얼핏 정책 자료를 요구하는 국회의원에게 담당 장관이 '네' 라고 답한 일상적인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단히 묘한 장면이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둘러싼 법정 공방의 원고와 피고이기 때문이죠. 조 의원은 교수 시절 교과부(당시는 교육인적자원부)를 상대로 '연구목적으로 쓸테니 수능 원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며 소송을 낸 것입니다. 이 소송은 조 의원측이 1, 2심에서 모두 승소했고 교과부는 판결 내용을 끝까지 수용할 수 없다면 대법원 상고심까지 끌고간 상태입니다. 결국 소송의 원고인 조 의원이 피고인 교과부 책임자 안 장관에게 현재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내용을 직접 '쪼고' 장관이 '그러마'라고 대답한 셈입니다. 대법원 상고심은 이제 필요없게 된 건가요.
조 의원은 소송에서도 그렇고, 이번 국회 질의 과정에서도 그렇고 '학력 격차에 대한 정책적 대응 방안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줘야 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사실 학력격차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각종 데이타와 지표는 이미 다 나와있습니다. 전국 단위 학력평가 결과를 비롯해 많은 표본조사들이 축적돼있고 이를 통해 학력과 지역, 계층, 학교 등의 상관관계도 다 도출된 상태입니다. 굳이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수능 원점수는 그다지 필요치 않습니다. 수능 원점수가 갖는 핵심적인 의미는 대학 입시에 있어 학교별 격차를 명확히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이른바 '3不'의 하나인 고교등급제 금지의 불합리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데이터가 수능 원점수일 것입니다. 수능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대입 선발의 핵심 잣대를 들이대 학교간 학력 격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각 고교의 내신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평가할 수 있나'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 의원을 비롯해 수능 원점수 공개를 원하는 측의 궁극적인 목적은 '학력 격차 해소'라기 보다는 '고교 평준화에 따른 대입제도의 불합리성'을 따지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태도입니다. 차라리 오인탁 연세대 명예교수가 어제 '교육선진화 대토론회'에서 "교육 선진화를 위해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논쟁의 건전성을 위해 바람직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자 논의가 간단명료해지는군요. 30년 넘게 지속해온 교육평준화 제도는 실패이고 따라서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평준화 제도가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향 평준화라는 비아냥이 대표적이고요, 학력 수준이 천차만별인 학생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다보니 교습의 효율성이 저하된다는 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대학교까지는 걸러지는 장치가 전혀 없으니 모든 학생이 재능에 상관없이 국, 영, 수 공부에 매달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교육 부문의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부정적인 요소와 평준화를 실시하기 전 우리 교육이 안고 있던 문제점들의 경중을 비교형량해 봅시다. 평준화 조치가 나오기 전의 우리 교육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소위 1류 중학교를 가기 위해 집안이 좀 먹고 살만 했던 모든 초등(당시는 국민)학생들은 그룹 과외, 개인 과외, 학원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중, 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교육은 입시 위주로 짜여졌고 이를 위해 학교 분위기는 흡사 병영과 같았습니다. 학생에 대한 모든 평가 기준은 학업 성적이었고 그외의 특활 활동이나 학생 자치활동은 장신구요, 들러리였습니다. 12살에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나면 인생은 1류와 2류, 3류, 등급외로 명확히 구분되면서 평생의 행로가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거나, 또는 당시 1류 인생을 사신 공부 잘하던 분들에게는 별 불만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지옥도가 우리 학교 현실이었습니다. 평준화 조치는 적어도 이런 병폐의 급속한 진전을 막거나 적어도 속도를 늦췄습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평준화를 전면 폐기하고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앞서 열거한 교육의 병리 현상은 더욱 심화돼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구요? 당시보다 더 잘살게 된 많은 국민들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사교육에 매달릴 터이고 성적은 부모의 재력순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한 학기 학비가 수백만 원씩 하는 각종 특목고와 자사고들이 신흥 명문으로 자리 잡으면서 확실한 귀족학교가 될 것입니다. 가뜩이나 입시에 묶여 황폐화되고 있는 공교육은 더이상 돌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될 지도 모릅니다. 총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부의 세습화, 계급의 고착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내부적인 극심한 모순을 겪고 마르크스가 예견한 파국의 길로 치닫던 자본주의를 구원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노동 운동과 복지, 그리고 교육이었습니다. 노동자에게도 자본가의 불합리한 횡포에 맞설 수 있는 권리를 줌으로써 혁명적 상황으로 가기 전에 미리 미리 갈등을 해소하고 풀 수 있는 길을 열어줬죠. 몸이 아파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죽어가던 상황에서 이제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돌봐줌으로써 빈곤층의 불만과 적개심을 한층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의 기회 균등을 보장함으로써 나는 이렇게 못살지만 내 후손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줬죠. 이 세가지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고 체제를 버텨주는 세 대들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의 현 상태에서 평준화를 빼버리면 교육의 기회 균등이 과연 가능할까요? 교육열이 활화산같이 뜨거운 우리나라의 특수한 현실 속에서 교육이 불균등하다는 불만이 쌓일 때 이를 어떻게 해소하죠?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감히 평준화에 대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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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보도국의 신사'로 불리는 우상욱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사회, 정치,경제부를 두루 거치며 지금은 사회1부의 교육담당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성실한 취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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