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이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과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개원연설중 대북 대목에 강경 대응을 하고 나섬으로써 당분간 남북관계를 '포기'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강수 배경과 의도에 대해선 시각에 따라 다른 분석을 내놓지만 남북관계의 경색이 올해를 넘길 것이라는 데는 전망이 일치한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이 대통령의 시정연설 중 남북관계 대목 전반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거부하고 6.15공동선언 및 10.4선언의 이행을 북측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한 것을 "가소로운 잔꾀"라고 평가절하하며 두 선언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노동신문은 이 대통령이 남북간 쟁점인 6.15 및 10.4선언을 따로 떼내지 않고 과거의 다른 남북합의들과 함께 언급한 것과 이행 입장을 확실히 밝히지 않았으며, 북핵문제의 선결을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북한은 또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의 피격사망 사건에 대해서도 하루만인 12일 우리 정부 당국의 현장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사건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면서 남측의 사과와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남측 피살된 민간인에 대해선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남측 당국에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하면서 요구가 충족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적반하장'이라는 남측 여론을 자초했다.
이는 남측 당국의 대북 운신의 폭을 극히 좁혀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됐다.
북한의 이러한 강경 행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악화된 감정과 불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남북간 경색 국면이 장기화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에 따라 어느 시점엔간 경색된 남북관계의 전환이 시도되겠지만, 한반도 안팎의 정세상 올해안엔 힘들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한이 자신들에겐 '황금알'일 수도 있는 금강산관광 사업의 중단까지 각오하며 강경대응하고 나선 배경엔 핵문제의 진전에서 비롯된 북미관계 개선이 있다는 게 보수.진보 양 시각이 일치한다.
북한은 핵문제의 진전을 바탕으로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등 대미관계가 개선되고 있고 중국과도 어느 때보다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아쉬운 것이라면 경제지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국으로부터 50만t의 식량지원에 이어 중국은 물론 러시아, 이탈리아 등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굳이 남측 정부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 경제여건 악화 등으로 인해 지지도가 추락한 상태이고, 남북관계가 악화될 경우 대북정책 자체에 대한 논란이 격화될 수 있으며 남한의 경제에도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수세에 몰린 쪽은 남한 정부라고 북한은 판단하고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본격적인 포문을 연 4월1일자 노동신문의 '논평원의 글'은 "남조선이 우리와 등지고 대결하면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두고볼 것"이라는 협박으로 지금의 강경대응 기조를 예고했었다.
더욱이 북한의 사고방식으로 미뤄 "반북적인" 이 대통령이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을 보고받고도 시정연설에서 6.15. 및 10.4선언을 언급한 것을 보고 이명박 정부가 수세이며 남북관계를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는 자신들의 인식과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으로서는 지금 동북아 정세가 자신들이 손해볼 게 없다고 보는 것인데, 남북관계를 빼고는 대외정세가 불리할 것이 없는 만큼 세게 나가도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 적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적 시각의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북한이 유리한 정세 국면을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길들이기 차원에서 강경 대응을 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측에 지금 남북관계는 우선 순위가 아니다"며 "오히려 이명박 정부가 코너에 몰렸다고 보고 길들이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이제 숨통이 트였기 대문에 통미봉남 전략에 따라 계획된 수순을 밟는 것"이라며 "남측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속도조절에 나서고 있고, 이 대통령의 대화 제의를 평가절하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성향의 전문가들은 남측 정부 길들이기 차원이라기 보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개입한 대남정책이 무산되고 남북관계가 경색된 데 대한 북한식 대응이라는 견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첫 단추를 잘못 꿰어 그렇게 됐는데, 길들이기 의도도 있겠지만 북한은 6.15와 10.4라는 근본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강하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측 길들이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상당히 기대한 측면이 있었고, 더구나 대선 전 이명박 캠프에서 북측과 여러 경로를 통해 남북합의 이행에 대해 너무 많은 메시지를 던졌다"면서 북한의 강경대응 배경에는 '배신감'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든 북한은 당분간 대미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남측에 대해선 강경기조를 유지할 게 확실한 반면 우리 정부도 지지기반 등을 고려할 때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에 향후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풀기가 쉽지 않다.
홍 전문연구원은 "북한은 '조건없는 이행'을 요구하고 있기때문에 아무리 쌀과 비료를 지원해도 당분간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며 "금강산 사건에 대해서도 북측은 계속 강경하게 나올 것 같다"고 전망하고 "북한은 10월까지 북미관계에서 속도를 최대한 내려할 것이고 이후 미국의 대선이 본격화되면 자연스레 남북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성훈 선임연구위원도 "남측과 대화를 하더라도 내년이나 돼야 하려 할 것"이라며 "북측이 급할 것이 없다. 올해는 부시 행정부의 남은 임기까지 핵문제 진전틀을 만들어 미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내년에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미관계를 다지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울=연합뉴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