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김경욱은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꽂아넣어 카메라렌즈를 두 번이나 부수며 '퍼펙트골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화살이 과녁 정중앙 초소형 카메라를 깨뜨렸을 때 사람들은 놀라 물었다. 신기의 활솜씨,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올림픽 대표 탈락이라는 시련을 딛고 8년을 묵묵히 시위를 당긴 김경욱 선수.
그의 금메달은 말한다. '활은 마음으로 쏘는 것.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과녁을 꿰뚫는다.' 마음이 바위 같으면 세상의 풍파쯤이야 스쳐지나가는 바람. 그의 금메달은 오늘도 빛나는 교훈이다.
김경욱은 이른바 '퍼펙트 골드'로 유명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개인전 결승에서 표적 정중앙에 설치돼 있는 초소형 렌즈를 맞히는 '10점 만점 중의 만점'을 두 차례나 기록,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확률상으로 1만분의 1도 넘는 불가능한 기록이었다. '퍼펙트 골드'라는 신조어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김경욱의 진가는 '오뚝이 신화'를 일궜다는 데에 있다. 애틀랜타 올림픽 2관왕에 오르기까지엔 8년여의 기나긴 절치부심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고생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찌감치 명궁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서향순·김진호의 뒤를 잇는 차세대 기수로 각광받았지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출전도 못하는 '악운'에 시달렸다. 88년 서울올림픽 출전 선발전 때에는 심판관이 확인하기 전에 화살을 뽑아 50m 10점 3발이 모두 0점으로 처리되는 불운을 맛봐야 했다.
"긴장을 풀려고 '이건 연습이야'라는 자기 암시를 계속 했어요. 그러다가 어이없게 진짜 연습 때처럼 한 거에요. 애로우마크를 통해 점수는 확인됐지만 규정에 어긋난 만큼 승복했어요. 어리니까 앞으로 기회가 많은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나 절망과 좌절의 나날이 계속됐다. 무리한 연습으로 어깨 부상 등이 겹치면서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선발전에는 출전조차 못했고,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선발전에서는 초반에 탈락하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태릉선수촌 내에서도 지독하기로 소문난 지옥훈련을 앞서 이겨내며 다시 일어섰다. 국가대표가 된 지 8년여가 흐른 뒤에야 꿈을 이뤘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 개인·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원동력은 '오기'라고 생각해요. 흔들릴 때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지옥 같았던 훈련 당시에 흘린 땀을 떠올렸어요. 다른 모든 걸 포기하고 양궁에 전념한 만큼 올림픽 금메달을 딸 때까지 가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거든요."
- 80 여주 여흥초등 4년 양궁 입문 |
- 89 세계선수권대회 개인 준우승, 단체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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