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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다, 걷다, 말하다, 외치다, 놀다

최우철

입력 : 2008.06.13 13:53|수정 : 2008.10.07 15:47

2008년의 여름, 6.10 반정부 촛불 시위


모이다 - '인파(人波)'라는 분노

인파(人波)란 경외심이 생기게 만드는 한자어다. 사람이 모여 물결을 이루고 파도로 변할 때는 간단히 표현하기 힘든 의지를 느끼게 된다. 이번 촛불집회 현장에 갈 때마다, '분노'라는 공통의 감정이 없으면 사람은 파도를 만들 일도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개개인은 분노에 기대어, 거대한 반정부의 촛불을 들고 있었다.

지난 6월 10일 저녁 7시 쯤 도착한 세종로는 낮게 일렁이는 촛불로 가득 차 있었다. 8시 현장 중계를 위해 청계광장 옆 중계차에 올라선 선배는 긴장된 표정으로 원고를 읽었다. 어떻게 하여 이 많은 사람이 여기로 모였는지, 스트레이트 기사엔 낮부터 지금까지의 사정이 담겨 있었다. 

촛불집회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모인 공간은 삼분할 구도를 갖춰왔다. 맨 앞 무대에선 발언이, 중간 광장이나 대로에선 구호가, 그리고 주변에선 팸플릿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시위 장소를 종단하자면 걷는 시간보다 멈춘 시간이 많을 만큼, 이 날의 인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알뜰한 도로점거로 꽉 찬 메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발언자가 무대에서 말을 하면, 시청쯤에선 이미 메아리가 될 지경이었다. 간간히 맞춰 부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역시, 선두의 반주와 후미의 노랫말에 시차가 났다. 거대한 돌림노래가 된 헌법1조가 컨테이너 박스에 부딪치며 더 크게 세종로를 요동치는 듯 보였다.

세종로 오른쪽 인도엔 인터넷모임과 시민단체가 만든 피켓 시장도 만들어졌다. 빨간색, 녹색의 전통적 피켓 뿐 아니라, 6.10 특별판처럼 보이는 다양한 색깔과 글씨체로 된 피켓이 늘었다. 함축된 구호를 담은 전통적인 피켓도, '~ 하지마', '안 돼' 같은 직접화법으로 된 피켓도 모두 인기품목이었다. 반정부 집회 참가자로서 다양한 표현수단을 얻은 시민들은 기뻐 보였다. 마음에 드는 피켓 두 세 개씩을 골라 등에 붙이고, 모자를 만들었다. 양 손에 겹겹이 피켓을 든 사람들은 풍족한 표현수단에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박원석 합동사무처장이나 '고대녀' 김지윤 씨처럼 촛불이 만든 스타와 문소리, 안치환 등 민중 스타의 발언과 공연이 이어지며 시위 분위기가 고조됐다. '명박산성'을 향해 야유를 쏟고 이순신 동상 너머엔 함성을 내지르기도 하며 시민들은 모두 다음 의식을 준비했다. 헌법1조를 실현하려는 노래는 컨테이너와 전경버스를 에워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걷다 - '몸'이 하는 행진, 반정부 연대

6월 들면서 행진에도 진법이 생겼다. 세종로와 안국동을 막아선 경찰에 시위대는 사직터널 진입시도로 압박을 한다. 선두는 늘 대학생이었다. 이 날은 대학생과 노동단체 깃발들이 서쪽 독립문 사거리를 향했다. 시민들이 걸을 때마다, 대로는 광장으로 변했다. 신문로에 이어 독립문길도 곧, 깃발과 구호로 가득 찬 광장이 됐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렬을 확인하고자 육교에 오르기도 했다. 육교 이쪽과 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마다 탄성을 질렀다. 뒤에서 함성을 지르면 앞에서 화답했다. 행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앞서가는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 사이에 있다.

사람은 원래 쉽게 등을 보이는 동물이 아니다. 모든 포유류는 약간의 거리낌이라도 있다면 시야 안에 상대를 둬야한다. 그런데 행진은 남의 등을 보고, 남에게 등을 보이면서 걷는 시위 방식이다. 땀이 솟는 뒤통수와 여름 티셔츠를 걸친 등을 맞대고 서너 시간은 걷는다. 오로지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진이지만, 이런 까닭으로 그것은 무엇보다 강렬한 반정부 투쟁이다.

대오에 몸을 맡기고 걷는 사람들은 몸과 구호로 연대했다. 협정무효와 대운하반대, 공기업 민영화와 교육자율화 반대 구호가 노래처럼 따라왔다. 이 노래의 후렴구는 언제나 '이명박 퇴진'이었다.

한 자리에 모여 의지를 확인하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에서 사람들은 배로 목청으로, 연대를 과시하는 함성을 질렀다. 사직터널 길 입구부터 서울시교육청, 새문안교회 골목골목을 막은 경찰들은 시민들이 함성을 맨몸으로 듣고 있었다. 영상기자와 나는 일부 시민들이 골목으로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교육청 옆 고갯길을 오르는 우리의 뒤통수에 함성이 와서 부딪쳤다. 함성은 빌딩과 고개를 넘어 청와대 잔디밭에 고일만큼 세고 단호했다.

밤 11시 반 쯤 교육청 길에서 시위대를 앞질러 신문로로 나왔다. 거기엔 '촛불의 강'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차로에 온갖 피켓을 놓고 두 줄로 세운 촛불들은 시민들이 양손을 빌려 연대하는 동안, 주인의 '꼬리'라도 된 마냥 신문로를 수놓고 있었다.

말하다 - 커뮤니케이션 2.0

#1

 6.10 촛불집회와 거리시위는 자유발언으로 끝이 없었다. 이 날 밤 세종로 일대에 모인 사람들은 예전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던, 집회-행진-대치(또는 충돌)-해산의 과정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불과 2주 만에 촛불집회는 거리시위를 추가하더니, '촛불집회 거리시위' 버전 1.0을 완성했다. 구 버전을 학습한 사람들은 이 날은 행진 이후에도 산발적인 문화제를 만들고 있었다. 사직터널 쪽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동아일보 건물 앞엔 자유발언대에 오르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자유발언에 나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시작부터, '여러분, 제가 여기 왜 나온 줄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누구나 발언을 하고 싶어 발언대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 당연한 얘길 자꾸 물으면 청중은 지루해하면서 자리를 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 기울여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말하려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직업과 나이만 다를 뿐 같은 불안과 불만을 가진 타인을 뚫어져라 본다. 자유발언의 화자와 청자 모두, 한 사람의 잘못으로 거리에서 밤을 새고 있는 탓이다. 심야 자유발언은 새벽 2시를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발언 가운데선 역시 솔직한 얘기가 반응이 좋다. 이 시간 거리에 있어서 당할 피로와 예상되는 피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진한 호응을 얻는다. 고등학생은 '엄마한테 걸리면 죽도록 맞을지 모르'고, 대학생은 '기말고사 망칠 게 뻔한데'도 이 밤중에 여기서 말을 한다. 시골 사람은 돌아가기 막막할 만큼 멀리에 사는 집이 있고, 직장인은 출근이 막막해도 마이크를 잡았다고 말한다. 컨테이너 박스를 바라보며 대답 없는 정부 앞에 선 넋두리, 성토, 투쟁의 의지가 밤  거리를 채운다. '정치'가 '생활'을 저버리자, 사람들은 '생활'을 버리고 '정치'를 꾸짖고자 나왔다. 발언 중간 중간엔 '이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여러분!'이란 물음도 자주 들린다. 정치를 꾸짖다가 직접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정치를 시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사건을 감추고자 하는 경찰 형님도 기자가 자꾸 묻다보면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취재는 자주 그렇게 이뤄진다. 소통의 유혹은 그 만큼 강하다.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을 공유하도록 문명은 발전해 온 게 틀림없다. 

어떤 교육학자는 2000년대의 10대를 두고, 역사상 가장 소통능력이 발달한 세대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학력저하란 기성세대의 환상일 수도 있다. 소통을 쉬워하는 10대가 맨 처음 촛불을 들었을 때, 집회는 소통이라는 생명을 얻었다. 인터넷과 자유발언이라는 소통의 방식들이 힘을 발휘한 덕분에, 촛불집회와 거리시위는 다양한 불만과 요구를 끌어안으며 40일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쌍방향이므로, 소통능력은 공감능력이기도 하다. 자유발언대 앞에 앉은 청중은 적극적인 청취와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영화를 보다가 졸고 쉽게 TV채널을 돌리는 사람들이 거리에선 모두 진지한 청중이다. 사실 발언 내용은 새로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접한 광우병의 과학적 근거나 정부의 정책실수들을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자유발언에서 발언 내용이 담은 콘텐츠의 끌림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이웃인 '발언자'의 말에 공감하며 그와 소통을 시도한다. 그렇게 발언대 앞에서 밤을 보낸다.

이 날 같이 취재를 한 동기는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놀랐다는 말을 했다. 자유발언은 처음엔 젊은이식 소통형식이었지만, 이젠 남녀노소가 없이 나선다. 발언대에서 말하는 자와 청중에게, 화요일 밤인 6월 10일, 11일 새벽은 이미 평일이 아니다.

외치다 - 시민 대신 올라간 깃발

일명 '명박산성'이라 이름붙인 컨테이너 박스 앞에서도 발언은 넘쳤다. 세종로 사거리 아래의 자유발언과 달리, 이곳에 선 시민들은 컨테이너에 올라갈 것인가를 두고 찬반 발언을 하고 있었다. 올라가려는 시민들이 스티로폼을 쌓으니, 말리는 시민들이 그 위에서 발언을 했다. 4시 무렵까지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새벽이 계속됐다.

'올라가'와 '내려가'. 시민들의 말은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컨테이너 앞에서 이글거리는 여론을 아침뉴스로만 접하겠다는 권력 앞에 선 시민들의 심정은 모두 같았다. 예비군도 아고라도, 의료지원단도 총학생회도 같은 마음으로 얽혀 밤 새워 다퉜다. 소설가 김훈이라면 '명박산성'에 갇힌 왕의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시민들의 아우성을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

 '올라가고 싶지만 내려와야 하고, 내려와도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같았다.' 

시민들이 스티로폼 탑을 오르내리며 언쟁하는 사이, 이 장면을 찍던 방송 취재기자들은 시위대의 모진 항의를 받았다. 이런 모습을 담아서 권력의 편을 들것이냐는 거였다. 혼란과 무지로 가득 찬 밤으로 묘사하지 말라는 조바심이 담긴 항의였다.

스티로폼을 치울 수도, 올라 갈수도 없는 한 두 시간이 지나고 깃발이라도 올리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올라가서 깃발이라도 흔드는 모습을 보자는 거였다. 이순신 동상의 허리와 칼자루만 보이는 산성의 아래에서 시민들의 극에 달한 답답함이 내놓은 답이었다.

 새벽 4시 반, 결국 대학과 노조, 인터넷 모임의 깃발을 든 사람들이 컨테이너 위에 올랐다. 깃발은 장벽 아래와 반대편 모두 훤히 보이도록 공평하게, 힘차게 나부꼈다. 태극기를 든 사람이 누구보다 오래 깃대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소통의 정부, 이것이 MB식 소통인가'라는 펼침막이 청와대 쪽으로 일어서자, 사람들은 어느 때 보다 크게 환호했다. 지난 40일 동안 혹을 떼러 나왔다가 도리어 쌓여버린 응어리가 잠시 풀린다는 표정이었다.

성 밖의 여론에 권력이 귀를 닫은 간밤엔, 깃발이 주권자를 대신해 컨테이너에 올랐다 내려왔다.

그리고, 놀다 - '시위 문화'의 탄생

#1

'문화'라는 단어의 정의를 찾으면 삶의 총체나 양식 같은 희한한 단어가 줄을 선다. 그런데 문화에 대한 설명엔 '삶'이 빠지질 않는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무슨무슨 문화라고 일컬어 주면 그것은 원래부터 있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령 클럽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일탈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삶의 양식을 '클럽문화'라고 받아들이면 클럽에서 즐기고 노는 일이 생활의 일부나 일상의 연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전통문화, 펑키문화 따위의 말엔 모두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의 행동을 긍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회학자들은 문화의 힘이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정당화해 준다고 했다. 문화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이상한 것이 아닌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모든 집회는 원래 정치적인 것이다. 대의제에서 이해관계가 대변 받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주 집회나 시위를 정치수단으로 쓴다. 세상을 바꾸는 집회도 있다. 그러나 정치로서 모든 집회는 한 사람의 삶을 놓고 보면, 계속해 나가기 힘든 것임엔 틀림없다. 아무리 심각하게 이해를 침해받더라도 손해보고 말 일이지 시위를, 정치를 생활로 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6월 10일로 한 차례 방점을 찍은 40일의 촛불집회는 정치만을 한 게 아니었다. 역사 상 어떤 집회보다 강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이 집시법을 근거로 도덕적으로 시위대를 타박할 때도, 시민들은 '문화'의 이름으로 버텼다. 촛불문화제와 비폭력, 평화의 구호는 모두 사람이 사는 방식을 말하는 '문화'의 속뜻을 공유한 말이다. 삶을 지키기 위해 내 삶의 한 방식으로 시위를 한다는 데, 비난과 협박이 통할 수는 없었다. 배후설이 오히려 집회 참가자들을 늘린 건, 생활을 모독하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다른 신문사 기자에게서 들은 얘기다. 5월 2일 첫 촛불집회가 있던 날 국정원 요원들이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내용인즉 이 집회는 몇 달이고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거였다. 집회는 대부분 엄숙하고 쉽게 지루해지지만, 이번 집회는 무한한 흥밋거리가 쏟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6월 10일 집회는 지난 40일이 가꾼 재미가 모두 모여 들끓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면서 누구보다 당당했다. '시위문화'가 탄생하더니 성숙해지는 무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날 세종로를 중심으로 서와 동, 남쪽은 모두 악기와 노래, 영화 그리고 웃음소리로 끊이질 않았다. 문화는 문화를 낳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은 앞으로도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2

시위 현장의 서쪽. 시위대가 행진을 한 자리엔 '촛불의 강'이 나 있었다. 도로교통법에서 가장 중요한 노란 중앙선은, 같은 색 촛불들이 수를 놓았다. 중앙선 사이엔 온갖 피켓들. 그 강을 지나는 사람들은 촛불 배경의 사진을 찍고, 꺼진 초에 불을 붙여 주었다. 행진 사이사이는 사물놀이패와 농악대 차지였다. 차진 태평소 리듬에 업힌 꽹가리 소리는 행진 대오의 아드레날린 공급기였다.  
  
동쪽엔 50여 개의 아프리카 민속 북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익살스런 마임으로 참가자들을 웃겨댔다. 아무나 북을 치고 싶으면 양해를 구하고 북 앞에 앉았다. 연주자를 바꿔가며 두 시간 넘게 절대 끝나지 않는 북소리. 아무나 나와서 춤추며 외치는 '이명박은 물러가라'. 50대 아주머니와 20대 총각이 흔드는 몸짓에, 샘이 난 듯 끼어든 아저씨의 막춤에도 사람들의 박수는 잦아들지 않았다.

서쪽의 불길과 동쪽의 북소리. 그 아래 남쪽으로는 심야 자유발언대가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철근으로 만든 조형물에 태극기와 촛불 수백 개가 걸려 탑을 만들었다. 촛농이 한꺼번에 녹아내리자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 속엔 '이명박 아웃'을 든 외국인도 있다. 동화면세점과 코리아나 호텔 사이엔 지프차에 올라탄 두 남자가 마임을 한다. 인도 전통춤처럼 피켓을 흔들며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다 목이 쉬었다. 그 앞에는 12인승 승합차의 뒷문을 열고 '촛불다방'이 불법 노상영업 중이다. 한 인터넷 모임 회원들이 차린 개점 기념행사엔 공짜 커피를 맛보려는 사람이 십 수 명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 무적의 김밥부대 회원들은 초코파이와 김밥을 나눠주다 잠시 쉰다.

명박산성에서 남으로 갈수록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식 토론을 펴는 논객들이 많다. 그들을 사이사이에 미니 락큰롤 밴드가 공연을 한다. 행진을 하던 농악대가 앉아 못다 푼 흥을 띄우기도 한다. 오징어 배처럼 반영구수명 전등을 단 수십 개의 길거리 음식 노점은 오후부터 불을 밝히고 있다. 대한문 앞엔 한 철학연구소 회원들이 차린 길거리 특강이 한창이다.

전경버스로 둘러싸인 시청광장은 어둡다. 캄캄한 광장은 진보신당의 토론회나, 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영화상영이 있다. 시청 행사 때문에 치우지 않은 야외의자가 훌륭한 관람석이 됐다. 돗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버지 옆엔 독립다큐에 푹 빠진 시네마키드의 안경이 반짝인다. 정당과 노조, 인터넷 언론의 현장부스도 리플렛을 옮기고 나눠주느라 분주하다.

컨테이너 박스를 두고 시민들이 양측으로 갈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성을 다시 되돌아가는 길. 드럼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는 청년을 만났다. 마이크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양한 문화가 받아들여지고 누구나 그것을 즐기는 하룻밤이었는데. 이게 제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사회이기도 해요."

 

  [편집자주]  사회2부 사건팀의 최우철 기자는 2007년에 SBS에 입사한 새내기 기자입니다. 특유의 적극성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건 현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작지만 빛나는' 진실을 찾아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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