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도 저렇게 멋진 필명을 지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던 일본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를 기자회견장에서 잠깐, 또 따로 청계천에서 잠깐, 만났습니다.
무국적, 탈성별적인 이름과 달리 바나나씨는 지극히 일본적인 옷차림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日.本.女.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적이면서도 탈일본적인 이야기를 씁니다.
바나나가 풀어놓는 사랑 이야기는 요새 세계 젊은이들의 '쿨한'-이 단어는 더이상 쿨하지 않게 돼버렸지만- 정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서가 뭔지 알아보고 싶어서 이태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다는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를 숙제하듯 읽고 무엇에 공감해야 할지 다소 난감했던 저에게 기자회견을 앞두고 급히 넘겨본 바나나의 <키친>역시 그렇고 그랬습니다.
공감하는 바가 있는 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제게 일본 현대 소설의 감정선은 잡았다 놓쳤다를 반복하는 '미끌링'같은 것이었습니다.
<키친>의 한 대목을 따서 표현하자면 이런 구절이지요.
'나는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둘의 마음은 죽음으로 에워싸인 어둠 속에서,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커브가 지금 거의 맞닿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지나면 서로 다른 회로를 따라 떨어지고 만다. 지금 여기를 지나면,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영원한 친구로 남는다.'
저와 일본 현대 (여성) 소설은 따라서, 애인이 아니라 영원한 친구로 남는 것이었는데, 신간 <왕국>은 감정을 되살릴 불씨를 살려놓았습니다.
마치 코엘류의 <연금술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인데, 특이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이해할 듯 말 듯한 우화적인 러브 스토리로 작가의 인생론을 풀어놓는 이 소설을, 바나나는 해리포터가 유행할 때 썼다고 합니다.
판타지를 써보고 싶었답니다. 이 소설은 그래서 판타지기도 하지만 바나나는 그렇다고 일본 현대 소설이 받는 비판-탈정치적이라는-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얘기들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곳곳에 숨겨놓았다구요"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음이 분명한 바나나는 "'순두부'집을 꼭 가보겠다"는, 썩 자신의 소설과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는 답변으로 -그렇다고 제가 순두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잠시 저를 정신적 시선을 빼앗더니만.
"늘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만,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다"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답변으로 뉴스를 만들어야하는 저를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 말이 바나나의 진심이라고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만, 역시 바나나 소설과 썩 잘 어울리는 답변은 아니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P.S
바나나의 신간 <왕국>이 읽을만한 가치가 읽느냐고 물으신다면,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면, 게이에 대한 편견이 없다면, 진도 죽어라고 천천히 나가는 연애 이야기를 참아낼 수 있다면, 따라서 '남녀 관계란 좋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거지 이게 뭐야'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저런 사랑도 가능하구나' 느껴보고 싶다면, <연금술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묶어놓으면 한 권 비슷한 분량의 책인데 세 권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면, 사서 읽어보세요. 라고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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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날카로운 문화적 감각과 통찰력이 묻어나는 인상깊은 칼럼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주형 기자는 1995년 SBS에 공채로 입사해 문화부와 SBS스페셜 등 호흡이 긴 기사와 방송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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