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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서 만난 어린 학생들

최고운

입력 : 2008.05.09 09:24|수정 : 2008.10.07 14:44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 취재기


많은 시위 현장에 나가고,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 현장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선 머리에 두른 띠와 격앙된 목소리의 어른들은 온데 간데 없고 아직 교복과 책가방 차림의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마치 연습한 듯 줄을 맞춰 앉을 때부터 당황은 시작됩니다. 현장의 소리를 담아야 하는 것이 임무이므로 마이크를 들이대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이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대답을 잘 해줄까, 그냥 친구따라 강남가듯 놀러오지는 않았을까.'하는 걱정에 마이크를 쥔 손이 무겁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황의 수치는 더 올라갑니다. 걱정과는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은 비교적 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학교에서 급식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는 현실에서 미국산 쇠고기는 당연히 자신들의 밥상에 먼저 올라올 거라는 건강 걱정에서 시작해, 쇠고기 협상을 너무 성급히 준비없이 했다는 것까지.

물론 언론에서 보도된 것처럼, 인터넷에 떠도는 광우병 '괴담'을 믿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라면이랑 떡볶이 먹어도 죽게 될거다, 공기로도 옮는다는데 광우병 걸린 사람이랑 만나게 되면 어쩌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쇠고기 먹을까봐 겁나서 나왔다 등등.

현장의 7-80퍼센트가 학생이라는 것과 이 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고 한다면, 이들이 대통령에 대해 보이는 분노를 목도할 때는 흥미로움이 생겨납니다.

보통은 아무리 대통령이 싫어도 삼삼오오 모여서 술 한잔 기울이며 욕하고 털어버릴 거라는게 기자의 생각인데, 학생들은 피켓과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것입니다. 정치적 구호가 문제가 된 시위였지만 학생들의 대통령에 대한 입장은 단호합니다.

교육현장을 고려하지 않는 영어몰입교육, 없는 자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는 민영의료보험 이야기를 꺼내며 한번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 달라는 학생들의 말은 온몸에 전율이 일 만큼 당찼습니다. 이 아이들의 정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투표로 연결됐음 좋겠다는 사소한 바람도 살짝 가져보구요.

며칠간에 걸친 촛불문화제가 정치적인 집회로 변질될까봐 경찰은 주최자 사법처리 방침을 밝혔지만, 현장은 순수한 촛불문화제로 끝내기 위한 정화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이나 비난 신문이 돌아도 흔들리지 말자며 서로에게 집회가 끝나는 밤 시간까지 용기를 북돋고 촛불을 새로 붙이는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 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번 집회에도 미국과는 분리불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은 나라의 국민이 갖는 저마다 다른 크기의 반미 감정이 표현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표정과 사람들이 집회에서 보여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단순한 반미 감정을 넘는 많은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현재 시위 인원과 경찰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충돌은 없는지, 정치집회로 변질돼 경찰이 채증에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계속 점검하는 것은 분명 정신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새삼스럽게 느낀 군중의 힘과, 사람 하나하나의 가치는 조금 더 사람냄새 나는 기자가 되는 길에 한 발 더 가깝게 했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펜을 놓습니다.

 

  [편집자주] 2007년에 입사한 SBS 사회2부의 새내기 최고운 기자는 늘 밝은 웃음으로 사건팀에서 '비타민'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험한 사건사고 현장을 누비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을 잃지 않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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