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들이 뽑은 우리 나라 대표 소설가, 네티즌 선정 20세기를 가장 빛낸 여성, 독자들이 꼽은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경리(朴景利)씨는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작가로서의 이러한 명성은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지' 한편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대작 '토지'의 육중한 무게에 다소 눌렸으나 토지를 전후해, 그리고 토지 사이사이 발표됐던 20여편의 장편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문단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토지'는 결코 평지돌출이 아니었다"며 "주제의식과 서술방법 그리고 작가적 역량의 면에서 '표류도'나 '김약국의 딸들'은 이미 '토지'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단편과 '성녀와 마녀' = 박씨는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 장편으로 옮겨갔는데 초기 작품들은 비교적 작가의 개인적 삶과 밀착돼 있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계산', '불신시대' 등 초기 단편소설은 작가의 신변 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의 초기 단편 '암흑시대'를 비롯해 초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했다.
작가가 쓴 첫 장편 연애소설로, 1960년 여성지 '여원'에 연재될 당시 파격적 자유연애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성녀와 마녀' 역시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과 개인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박경리 초기 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부유하고 유망한 작곡가 수영이 자존심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숙과 자신만을 바로보는 정숙한 여자 하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사실상 묻혀있다가 43년 만인 2003년에 첫 출간됐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 도덕과 새 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약국의 딸들'ㆍ'시장과 전장' = 박씨는 1960년대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중 연재가 아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됐던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1993년 재출간돼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남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린 작품이다.
김만수 군산대 교수는 "김약국의 어떤 딸도 내 딸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극한 모성의 원리야말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일 것"이라며 "작가가 몰두한 생명운동의 근원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나란히 서술하면서 전쟁 속 개인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지영과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훈을 통해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그려냈다.
최유찬 교수는 "이 작품은 남북 어느 한쪽의 시선에 기울지 않고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성과 외에 작가의 생명 사상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전쟁이란 집단의 횡포 앞에서 유린되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는 생명의 싹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완성 '나비야 청산가자'와 시 = 토지 완간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박씨는 2003년 9년 만에 신작 소설을 내놓았다.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가 끝난 시점인 1945년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린 작품으로 박씨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던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지식인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 작품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연재 세 차례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해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일했던 마름의 아들 석호와 결혼해 남남보다 먼 사이로 지내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농장일꾼 정서방이 자신의 딸과 석호의 간통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담아내려던 박씨의 시도는 안타깝게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우뚝 선 박씨였지만 첫 습작은 시로 시작했고 소설을 내놓는 간간이 시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의 시간' 등의 시집에 실린 진솔한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씨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생태와 환경에 대한 애착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한 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공교롭게도 박씨의 문학 인생은 시로 시작해 시로 끝을 맺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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