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수씨 폭행사건
#프롤로그
제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경찰청에서 회사로 복귀하는 시간은 6시에서 7시 사이입니다. 별일이 없으면 사건팀 후배들의 8시뉴스 리포트 제작을 도와주고 8시뉴스의 사건팀 기사를 함께 본 뒤 퇴근하거나,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그런데 어제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 영화배우 최민수 씨가 이태원에서 노인을 폭행한 것이 기사화돼 8시뉴스에 리포트를 하기로 결정된 것이죠. 그리고 그 기사는 이제 막 회사에 들어온 제가 쓰는 것으로 됐습니다. 7시 넘어 하달된 긴급명령! 급합니다!
Scene#1-19:30
단독기사였으면 좋았으련만, 이미 관련 기사들이 인터넷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8시뉴스 시작 시간이 30분도 안 남은 시점에서 사실 관계를 얼마나 정밀하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 저는 관련 사실들을 그러모아 기사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후배에게 최민수 씨와 측근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 내용을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른 후배는 사건이 일어난 이태원 현장으로 카메라팀과 함께 출발했고, 취재화면 송출을 위해 뉴스밴(news van:뉴스 카메라가 취재한 영상과 음성을 초단파로 방송국으로 전송하는 장비가 탑재된 차량)도 곧 회사를 출발했습니다. 대개 방송 리포트는 기자 1명과 카메라팀으로 취재가 이뤄지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방송에 대야 하는, 분초를 다투는 사안이 있으면 투입 가능한 인력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방송은 협업이라는 명제를 실감하며 기사를 쓰는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Scene#2-19:45
초벌 기사가 완성되고 데스크(기사를 교정하고 좀 더 나은 리포트가 되도록 '매만지는' 일을 하는 선배입니다. 대개 각 팀의 차장이 이 역할을 하죠.)가 기사를 보고 있는 사이 영상편집팀에 연락해 방송용 화면 취합을 부탁했습니다. 역시 시간이 많다면 비교적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제 막 카메라팀이 현장으로 출발한 상황이라 현장 화면을 전송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일단 최민수 씨와, 조사를 받았다는 용산경찰서의 '자료화면'만으로 방송 리포트를 만들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편집기자가 데이터베이스에서 최민수 씨 화면자료를 다운받아 편집을 시작했습니다.
Scene#3-19:50
최민수 씨 측근과 통화가 연결된 후배가 전화 인터뷰를 했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최민수 씨가 9시에 영화사에 마련된 개인 사무실에서 사과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이 추가로 취재됐습니다. 전화 인터뷰를 정리해 방송에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원인 제공자(측)의 해명은 기사에 필수적인 구성 요건이니까요. 다만 9시의 사과기자회견은 8시뉴스가 끝나는 이후에 이뤄지는 발생상황이므로 8시뉴스 기사에서는 '예고'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이 부분을 기사의 마지막 문장으로 처리한 뒤 기사 멘트를 녹음!
Scene#4-20:10
이미 8시뉴스는 시작. 앞 부분 리포트인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보도가 전파를 타고 있었습니다. 편집기자가 데이터베이스에서 다운받은 화면에 제가 읽은 기사 멘트를 입히는 편집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자료화면만으로 구성돼 방송 기사로서는 '다소 민망한' 리포트가 거의 완성될 무렵, 현장에서 송출한 스케치 화면이 들어왔습니다. 천만다행!
Scene#5-20:20
발빠른 취재와 송출 덕분에 사건 현장의 화면을 '섞어서' 리포트 편집을 마쳤습니다. 한 숨 돌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방금 전에 만든 따끈따끈한 기사가 전파를 타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방송기자에게는 이렇게 급하게 기사를 처리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사건 발생 자체가 뉴스 시간 언저리인 경우도 있고, 이번 사건처럼 발생은 과거의 일이지만 보도 여부가 뒤늦게 결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방송기자로서 주어진 임무를 간신히 완수하기는 했습니다만...
#에필로그
밤 9시에 열린 최민수 씨의 사과 기자회견이 밤늦게부터 오늘 아침뉴스, 각 방송의 와이드쇼까지 계속 반복되어 방송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주말 연예프로그램, 다음주 주중의 연예프로그램에서도 최민수 씨의 얼굴을 볼 수 있겠죠. 사건 자체는 아직 조사중이고, 최민수 씨 측과 폭행당한 노인 측의 진술이 일부 엇갈리는 부분도 있으니 현재 시점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기는 어렵지만,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유명 연예인인 최민수 씨가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이같은 일을 벌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의 최 씨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보답으로서, 당연한 것일 텐데, '나도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최 씨의 말을 들을 일이 아예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니,
그때, 그 자리에서 조금만 참지 그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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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IT분야에 전문성이 느껴지는 유성재 기자는 2001년 SBS에 입사해 정보통신부 출입기자와 인터넷뉴스팀 기자로 다년간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사회2부 경찰기자팀의 부팀장격인 '바이스캡'으로 활약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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