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봄이 시작되는가 봅니다. 이맘때쯤이면 섬진강 매화꽃이나 선운사 동백꽃이 보기 좋다던데 그림의 떡인 신세가 처량하네요. 봄이면 꽃놀이, 가을엔 단풍놀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가 점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네요. 에고~
각급학교가 새 학기 개학을 하면서 극장가 관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비수기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영화 '추격자'가 개봉 20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올해 들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이어 두 번째 300만 돌파 영화가 됐는데요. 신인감독에, 이렇다 할 스타도 출연하지 않고 떠들썩하게 홍보 마케팅을 벌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의 힘으로 성공하고 있습니다. 스타캐스팅이고 홍보를 통한 그럴듯한 포장이고 상관없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 만들면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 통한다는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앞으로 이런 영화들이 많이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개봉 예정작들을 쭈욱 훑어보니 매주 많게는 서너 편씩, 적어도 한 두 편씩은 꼭 개봉됐던 한국영화가 한주에 한편도 못 미치게 드문드문 박혀있더군요. 더 좋은 작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위한 숨고르기 단계였으면 좋겠습니다.(이런 덕분에 유명 배우들을 TV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아지고 있네요.) 4월까지는 눈에 확뜨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별로 없어 비수기가 더욱 침체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7편의 국내외 영화들이 선보이는데 입맛이 확 땡기는 작품은 별로 없습니다.
마이 뉴 파트너(감독:김종현, 주연:안성기, 조한선, 15세 관람가)

경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영준(조한선)은 다른 경찰들의 비리를 감시 적발하는 내사과에서 일합니다. 영준의 아버지 민호(안성기)역시 경찰인데 업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뇌물을 받아먹고 엄마를 버리고 애인을 사귀다가 징계도 먹고 엄마도 세상을 떠납니다. 영준은 이런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부산 마약조직과 관련된 사건 수사를 맡으면서 아버지와 8년 만에 공조수사를 벌입니다. 아들은 명석한 두뇌로 과학수사를 주장하지만 아버지는 감에 의한 수사를 앞세우며 티격태격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였습니다. [리쎌 웨폰]이나 [나쁜 녀석들]같은 형사 버디 무비 형식을 취하는데 두 주인공이 부자관계로 설정됐다는 특징입니다. 영준과 아버지의 과거 관계를 과감한 생략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전달해주는 도입부의 속도감도 괜찮고 컴퓨터 그래픽과 맨몸 액션을 결합한 초반부 놀이공원의 추격 장면도 신선합니다. 영화의 주제인 '부자 관계의 복원'도 중반까지는 도청기를 역이용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접 대화 등 간간이 등장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양념삼아 웃음과 코끝 찡함이 잘 버무려져 맛깔스럽게 표현됩니다. 특별출연으로 나오는 류승수가 달동네 구멍가게 앞에서 두 주인공들과 벌이는 코미디 한판이 제일 쎄더군요.
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며 악당과 대결하는 장면에서부터 지나치게 화끈해지며 영화의 일관된 리듬에서 벗어나 영화 전체의 맥락이 흐트러집니다. 어느 부분을 중요하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은 만든 사람 판단의 문제이지만 그렇게까지 쎄게 갈 필요가 있었느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자관계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깔고 형사와 악당의 대결구도와 액션장면은 볼거리로만 기능하는 부수적인 역할에 머물렀더라면 더 밝은 톤으로 깔끔한 맛을 느꼈을 텐데….
[열혈남아]에서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연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조한선은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장면 장면의 연기도 좋고, 특히 심각한 표정의 클로즈업 장면은 그 어떤 만화속 멋진 캐릭터도 따라올 수 없는 매력을 발휘하는데 캐릭터가 전체적인 조화가 부족해 입체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관록 있는 안성기뿐 아니라 동료형사로 등장하는 정석용, 건달역의 박철민 등 조연들의 편안한 연기가 그나마 안정감을 잡아줍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감독:폴 토마스 앤더슨, 주연:대니얼 데이 루이스, 폴 다노, 15세 관람가)

[매그놀리아],[부기 나이트] 등 문제작을 선보였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작품으로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로 만들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기회의 땅 미국에서 초기 석유개발업자를 통해 자본주의와 기독교라는 틀로 미국 사회를 암울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더군요. 국내외 리뷰들을 뒤적여보니 높은 작품성을 획득했다는 칭찬들이 많던데 내공이 딸리는 저는 어렵고 별 재미없었습니다. 두 시간 반 가까이 되는 긴 상영시간에 한 인물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그리는데 현대 음악 같은 불협화음에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까지 겹쳐지는 음악이 귀에 거슬려 상영시간을 겨우 버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초반 금을 캐는 주인공의 작업을 마치 기록영화처럼 대사도 없이 보여주는 20여분의 장면과 검은 석유가 터지는 장면, 사고로 석유에 불이 붙어 노란 화염과 검은 연기가 황량한 벌판 하늘을 가득 뒤덮는 장면 등 강렬한 이미지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는 않더군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도 탁월하지만 제3계시교 전도사로 나오며 루이스와 끝까지 대결 구도를 펼치는 젊은 배우 폴 다노의 연기도 섬뜩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집결호(감독:펑 샤오강, 주연:장한위, 라야오팡, 12세 관람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떠오르는 중국 전쟁영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제규 감독이 이 영화 제작준비 단계에서 펑 샤오강 감독에게 많은 조언을 했고 [태극기..]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하기까지 했습니다. [태극기..]에서는 국군과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대고 싸웠지만 여기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과 장개석의 국민당 군인들이 싸우고 후반부에는 한국전쟁도 나옵니다. 다행이(?) 중공군과 국군의 교전장면은 안 나오고 미군과 조우하는 장면만 나오더군요. 만약에 교전장면이 있었더라면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규모 전쟁 장면은 리얼하게 묘사됐고 자신의 확신 없는 판단으로 동료 전우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살아남은 자의 고뇌도 잘 표현됐습니다. 감독의 출신성분이 반영된 때문인지, 좋은 집안 출신의 엘리트가 아니라 글자도 못 깨우친 하층민 출신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와 인민들에게 칭송받을 만한 보훈영화 내지는 블록버스터급 배달의 기수 같은 냄새가 팍팍 풍기는 게 좀 거시기 하더군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감독:왕가위, 주연:노라 존스,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12세 관람가)
왕가위 감독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과 상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전 작품들과는 노라 존스라는 유명 가수와 할리우드의 쟁쟁한 배우들을 데리고 영어로 찍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투게더]같은,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의 걸작들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성숙보다는 퇴행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인 노라 존스나 주드 로 보다는 조연급으로 나오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제일 생동감 있고, 감독의 음악 고르는 재능은 여전하지만 인물들의 대사는 덜 익은 낭만이 뚝뚝 떨어져 간혹 유치함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밖에 로맨틱 코미디 [27번의 결혼 리허설]과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인 없을까],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가 기획 제작한 1980년대를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등이 개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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