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 마시는' 와인

한국에 자전거 열풍이 불면 천만원짜리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북한산에 등산가더라도 등산복과 등산화같은 장비만큼은 에베레스트 오를 때처럼 입고 신어줘야합니다.

와인 열풍에도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와인은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먹어치우는 것이어서 그런지 아주 비싼 와인을 마시는게 일반화된 건 아닌 것 같지만 와인 지식의 습득에 있어서만큼은 다릅니다.

교보문고에 가면 와인책만 모아놓은 특별판매대가 있는데 거기 있는 책만 40여종입니다. 대개가 최근 몇 달 혹은 몇 년 사이에 나온 겁니다. 소주나 맥주 마시면서 책 사서 공부하는 사람 없습니다. 아는 게 병이라고, 공부해가며 와인을 마시니 술 마시면서도 슬쩍 스트레스 좀 받겠죠?

요사이 제일 잘 나가는 와인 책 <와인의 세계>의 저자 이원복 교수를 만났습니다. 선릉역 근처 한 오피스텔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기대와 달리 사무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었습니다.그의 만화가 회화적인 면에서는 더이상의 진보를 보여주지 않듯이, 그의 사무실도 예술적 향취가 풍기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원복 교수가 지난해 12월 와인 책을 펴낼 때, '아니 이 분도 시류에 영합하시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게 첫 질문이 됐습니다.

"저는 시장에 영합하는 그런 거는 아니고요, 저도 3년 전 만해도 와인 책을 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요즘에 우리나라에 불어닥치는 와인열풍에서 뭔가 석연치 않아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좀 주제는 넘지만 이런 기획을 하게 된거죠."

이원복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와인 상식과 서로 나누는 대화 속에 오리엔탈리즘이 과도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양을 숭배하고 동양을 변방으로 보는 자기폄하적 사고가 들어가있다는거죠.

"와인 하나 사다놓고서는 그렇게 오묘하게 서양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이 그만큼 외국문화에 대한 숭배아니겠어요? 그것을 좀 바로잡는다기 보다는 '이거는 아니다' 하는 뜻에서 와인책을 기획하게 된겁니다."

저는 못봤지만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이 이원복 교수를슬쩍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신문과 인터뷰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저도 물어봤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신의 물방울>이 '뻥이 심하다'고 하셨던데요?"

"뻥이 심한정도가 아니죠. 와인 한 잔 마시고 눈물 좌악 흐르지 않으면 무지한 사람이 되버리잖아요. 그리고 와인 한잔 마시면 뭐 아기 사슴 눈망울이 생각나고 하얀 베일을 쓴 어떤 미모의 여성이 생각나고  건 작가적 상상력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생각하는건 아니죠."

사실 이번 인터뷰를 하게 된 건 한 후배기자와 와인에 대해 얘기하다 이런 말을 들어서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와인을 입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마신다"

후배 기자가 이원복 교수가 한 말이라며 들려준 이 얘기를 듣고 "맞다, 맞아..." 맞장구를 쳤습니다. 상황을 잘 정리한 근사한 말이고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얘기는 한 프랑스 와인업자가 한 얘기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와인을 입으로 마시는게 아니라 머리로 마신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게 다 이유가 있다고 봐요. 왜냐면 한국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와인을 접한 국민입니다. 다른 전세계가 일본과 한국 빼놓고는 서양 사람들이 식민지 지배를 했잖아요. 서양사람들은 기독교적 사람들이니까 예수님의 피인 와인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전세계가 수 백 년 전부터 와인을 알았지만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와인을 못겪었고 최근에 와서 경제가 올라가니까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가 수백년간 즐겨왔던 그런 와인 상식을 추월하려다보니까 그것이 압축 성장하는 또 하나의 단계라고 보는겁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 지나치게 와인에 대한 신비감이라 할까  내지는 숭배감 이런것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와인을) 숭늉처럼 마시는 상황들과는 달리 이렇게 뭔가 떠받드는, 그런 면이 저는 좀 못마땅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