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즈음해 국내 개봉되는 수상 유력 후보작들을 소개해 드리는 순서, 오늘은 그 두번째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잘 써질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작품 [어톤먼트]까지 모두 세편을 써보려고 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코엔 형제, 주연: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청소년관람불가)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조연상(하비에르 바르뎀), 촬영상, 감독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상, 각색상 등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있습니다. 영화가 공개되자 미국 평단은 [파고]이후 코엔 형제의 최대 걸작이라며 칭찬해대느라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후 여러 시상식에서 굵직한 상들을 줄줄이 받아오고 있어 아카데미에서는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 지 궁금합니다.
텍사스의 황량한 사막지역, 웬만한 강심장에 얼굴 철판 구비하지 않았다면 다니기 어려운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산소통을 들고다니는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는 경찰에 검거됐다 탈출합니다.(첫 살인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은 공포를 안겨주는데 보실 분들 김빠질까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궁색한 트레일러 주택에 살며 사냥으로 소일하던 모스(조시 브롤린)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마약거래를 하다가 뭐가 잘못돼 총격전이 벌어진 뒤 차량과 시체가 즐비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단 하나의 생존자인 멕시코 아저씨는 물 좀 달라고 호소하지만 모스는 이를 외면하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놈과 그놈이 챙겼을 돈 가방을 추적합니다. 예상대로 그 놈은 나무 그늘아래 죽어있었고 2백만 불이 든 돈 가방을 챙겨옵니다.

그날밤 잠을 뒤척이던 모스는 일말의 가책을 느꼈는지 물통을 챙겨들고 범죄현장에 다시 가지만 그곳에서 살인마 쉬거와 조우하고 이후 영화는 내내 무시무시한 살육과 추격전이 진행됩니다. 피곤하고 무표정한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은 이 사건이 점점 통제 불능한 재앙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모스를 구하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면 할수록 무기력감은 깊어갑니다.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에서 인간의 사소한 오해와 헛된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웃지 못 할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스운 비극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던 코엔 형제는 비슷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 다소 비관적으로 변한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돈가방을 쫓아라라는 어찌 보면 평범한 모티브에서 출발하지만 전개 과정이나 결말은 전혀 예측불가능하고 잔인할 정도로 암울한 비극적 공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도 좋지만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애리조나 유괴사건]을 제일 좋아합니다.)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토미 리 존스의 비중보다 조연으로 이름을 올린 안톤 쉬거 라는 인물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을 대변합니다. [파고]에서 스티브 부세미가 연기한 악당은 불쌍해 보일만큼 멍청해 실소를 자아내지만 이 영화의 악역은 자기 철학이 확고하고 어떤 역경도 남의 도움 없이 헤쳐 나가는 능력을 지녀 사탄업계의 맥가이버라 불러도 될 것 같고 웬만한 부상은 혼자 힘으로 수술까지 하는 불사조 같은 능력은 죽여도 다시 일어나 쫓아오는 터미네이터 같습니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도살장에서 쓰는 산소통을 들고다니며 벌이는 그의 추격과 살인행각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청바지 패션과 어우러지며 영화를 본 뒤 길에서 이런 비슷한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것 같은 공포 카리스마를 뿜어냅니다.(나름대로 스페인에서 국민배우로 존경받을 정도인 이 배우, 70년대 사창가 주변을 찍은 사진에서 발견한 헤어스타일을 놓고 코엔 형제가 "그래 바로 이거야!"했을 때 속으로 "아이 씨발"했다더군요.)
이 인물은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도통 설명이나 회상장면 없이 그저 목표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가고 자기만의 운명론 내지는 인생철학까지 설파합니다. 어떻게 자라나서 어떻게 악당이 되었는지가 아니라 순수추상 개념의 '악마성'이 인간의 탈을 쓴 모습 같습니다. 그러니 사막 한가운데 구멍가게에서 노인과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가슴 졸이는 조마조마함을 느끼고 퇴락한 호텔방에서 모스가 쉬거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귀신같이 냄새 맡고 따라온 쉬거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엄청난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감초처럼 따라와야 할 음악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특징입니다. 음악 없는 건조한 침묵은 황량한 텍사스의 풍광과 어우러져 무미건조함 속의 오싹함을 더욱 깊게 해주는 효과적인 선택입니다. 슬퍼야할때 슬픈 음악, 기뻐야할때 기쁜 음악 등 딸리는 연출력을 자동 연주 분위기 음악으로 때워보려는 손쉬운 유혹을 남발하는 평범한 감독들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서 느꼈던 절망감을 맛볼 것 같더군요.

영화 앞부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끝을 장식하는 보안관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도 특이합니다. 한평생 보안관으로 나름 봉사했지만 세상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변해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성찰하고 비극이나 파국을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함께 갖고 있는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파고]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했던 경찰과는 사뭇 다릅니다. [파고]에서는 건성건성 하는 것 같지만 예리한 직감을 동원해 거짓말을 간파하고 사건의 해결에 한발 한발 일직선으로 다가갔다면 이 영화에서 보안관은 방관적인 관찰자에 가깝습니다.
직접 쓴 각본으로 영화를 만들어 온 코엔 형제의 특징과는 다르게 이번 영화는 원작 소설을 영화화 했는데 그만큼 감독이 그리고자하는 영화세계와 소설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겠죠. 원작을 쓴 코맥 매카시는 원작 소설의 주제를 세상이 점점 나빠져 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파했는데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영화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무서운 걸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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