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국서 연수 중인 김수현 기자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인사 드리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 학교 수업 따라가느라, 과제물 내느라, 살림하느라(^^) 바빠서 한동안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스페인 그라나다 여행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짧은 겨울방학 동안 짬내서 다녀온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이야기를 블로그(https://ublog.sbs.co.kr/shkim0423)에 조금씩 올리고 있는데요. (스페인이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대국이지만, 특히 영국 사람들이 스페인 여행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영국에서 가깝고 싸기도 해서 여기서 스페인 가는 건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가는 정도인 것 같아요.) 여러 도시를 다녔지만, 그 중에서 이야깃거리가 많았던 그라나다 편만 골라 보내드립니다. 다른 여행 이야기도 궁금하시면 제 블로그에 놀러오세요.
두번째 학기가 시작됐고 과제물 하나 제출 시한이 다가오고 있어서 한동안 또 정신없이 지내게 될 듯합니다. 자주 소식 못 전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기를. 아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영국에서는 설날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지만 한국 슈퍼에서 떡 사다가 떡국이라도 끓여먹어야 것 같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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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알함브라가 있는 그라나다. 스페인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하던 그라나다. 안달루시아 여행 나흘째, 우리의 행선지는 바로 이 그라나다였다.
그라나다가 어떤 곳이냐고 묻는 은우에게 '알함브라의 추억'의 기타 트레몰로를 목소리로 흉내내어 들려주기도 하고, '그라나다'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코스타 델 솔의 숙소에서 출발해 2시간 이상을 달렸다. 그라나다가 가까워지자 사시사철 흰 눈으로 덮여 있는 시에라 네바다도 보인다. 처음에는 구름인 줄 알았는데 거대한 산맥이다.

그러나다 시내에 들어가니 길은 좁고 교통이 꽤 복잡하다. 더구나 무슨 행사가 있는지 통행을 막은 도로도 있어서 알함브라에 도착할 때까지 약간 헤맸다. 알함브라는 언덕 위에 있었다. 여행 안내서에는 긴 줄에서 기다리지 않으려면 입장권을 BBV은행이나 인터넷(www.alhambratickets.com)에서 예약하는 게 좋다고 돼 있었지만, 숙소에서 인터넷 구매가 여의치 않은 데다, 스페인 어도 못하고 영어도 잘 안 통하는데 선뜻 현지 은행에 가게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행 성수기도 아니고 평일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알함브라 매표소 앞에는 적어도 100미터 이상은 돼 보이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미리 표를 예약하고 온 사람들은 따로 마련된 창구에서 표를 찾아서 들어가고 있었다. 예약하고 올 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줄 끄트머리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한참을 기다리다가 아까부터 계속 무슨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스페인 어, 그 다음에는 영어로 나오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몇 단어가 들린다. "50장 남았습니다." 뭐라고? 50장 남았다고? 입장권이 50장 남았다는 얘기야? 설마? 이제 낮 1시 조금 넘었는데? 주변을 보니 함께 줄선 사람들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잘못 들었나 보다.
조금 있다가 또 방송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매진'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그럴 리가.도저히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있다 또 방송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더 확실히 '매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든 티켓'이라는 말도 함께 들린다. 함께 줄서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아마 잘못 들었을 거야. 정말 매진이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다릴 리가 없잖아.
그런데 줄 맨 앞쪽에 서있었던 미국인 관광객이 줄을 이탈하는 게 보인다. 쫓아가서 물어보니 '오늘 표는 다 팔렸대. 나는 그냥 시에라 네바다 스키장에 스키나 타러 갈래' 한다. 으아아아악. 그럼 우린 뭐야?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오래 기다렸는데?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안 가고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안되겠다. 직접 확인해 봐야지.
남편과 아이들이 줄에 남아있는 동안 나는 '확인'해 줄 사람을 찾아 매표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명찰을 단 매표소 직원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붙잡고 물어봤더니 궁전 실내에 입장할 수 있는 표는 다 팔렸고 이제부터는 정원만 볼 수 있는 표를 판다는 거다.

여기서 '궁전 실내'라 함은 '나스리드 궁전(Nasrid Palace)'을 말한다. (위 사진. 알카자바에서 바라본 나스리드 궁전 전경) '알함브라'는 원래 Calat Alhambra(Red Castle),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알함브라에는 여러 건축물이 있지만,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 지역에 있었던 이슬람 왕국 '나스리드'의 궁전이 알함브라의 '핵'이다. '정원 티켓'은 역시 나스리드 왕조?는데, '가장 고귀한 정원'이라는 뜻의 사라센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를 볼 수 있는 티켓이다.
안내서에는 알함브라 개방 시간이 밤 9시 반까지라고 돼 있었던 것 같아 다시 물었다. 야간 입장권도 있느냐고. 왜, 에버랜드 같은 곳에서도 야간 입장권을 따로 팔지 않는가. 과연, 야간 입장권이 있단다. 저녁 7시부터 입장할 수 있는. 그런데 이건 지금 표를 살 수 없고 저녁 6시부터 판단다. 직원은 판매 시작 전에 와서 줄을 서야 표를 살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우리 앞줄에 서 있던 여자가 내가 직원 설명을 듣고 오는 걸 보고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묻는다. 왠지 유럽 동부 사람 같다는 느낌을 주는 아가씨였다. 내가 설명해 주자, 한숨을 푹 쉬면서 잠깐 자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한다. 왜 그러나 했더니 구석에 가서 담배를 꺼내 물고 있다. 우리도 허탈하지만, 저 아가씨도 얼마나 허탈한지, 그 모습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일단 정원 표를 사기로 했다. 정원 표로 입장해서 구경한 뒤 영 미련이 남으면 야간 입장권을 사기로 하고. 정원 표를 사는 데도 한참 기다려야 했다. 우리 앞줄에 서 있던 외국인 관광객이 영국서도 그랬지만, 우리 나라에 비하면 이런 일 처리는 정말 느리다. 표 파는 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걸리는지. 기다리는 동안 한국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입장하는 걸 보면서 너무나 부러웠다.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엿들으니' 얼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장하면 보존이 어렵기 때문이란다. 가이드가 '이렇게 미리 예약했으니 망정이지 그냥 오시는 분들은 헛걸음도 많이 하세요' 하는 걸 듣고 정말 속이 쓰렸다. 혹시 남는 표 있나 물어볼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나스리드 궁전은 입장하는 시각까지 하루 몇 차례로 정해서 입장객을 엄격하게 제한한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결국 알함브라에 3시가 다 돼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과연 입구에서 직원이 바코드 인식기를 들고 관람권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다. 우린, 어찌 됐든, 알함브라에 오긴 온 것이다! 전날까지 비가 내렸는데 이 날은 날씨가 정말 쾌청하고 따뜻했다. 아직도 속이 약간 쓰리긴 했지만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알고 보니 '정원 티켓'은 '정원만 볼 수 있는' 티켓이 아니라, '나스리드 궁전만 빼고 다른 곳들은 다 볼 수 있는' 티켓이었다.
나스리드 궁전은 카를로스 5세의 궁전과 바로 붙어 있었는데 그리 큰 건물은 아니었다. (위 사진. 나스리드 궁전 측면을 배경으로 찍음)오히려 기독교도가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한 뒤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이 겉에서 보기에는 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밖에서는 네모난 건물인데 들어가 보면 원형인(‘a circle in a square’) 구조가 아주 독특했다. (아래 사진 왼쪽이 카를로스 5세 궁전 전경. 나스리드 궁전은 이 건물 왼편에 있다. 오른쪽 사진은 카를로스 5세 궁전의 내부)

궁전 앞쪽의 '푸에르타 델 비노(Puerta del Vino, The wine gateway)'라고 불리는 문을 통과하면 알카자바(Alcazaba, 성곽)로 이어진다. 알카자바에서 보는 나스리드 팰리스, 그리고 그라나다의 옛 시가지 '알 바이신' 풍경은 정말 멋졌다. 궁전 가기 전에 마주쳤던 산타 마리아 교회는 비교적 최근 건물인 듯한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예쁘게 솟아 있었다. '나스리드 궁전을 뺀' 나머지도 충분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Generalife 정원에 들렀을 때, 또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여기도 작은 궁전이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나스리드 왕조의 군주가 휴식을 취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사진으로 많이 봤던 풍경이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설계된 정원, 화려하게 장식된 테라스를 보고, 나스리드 궁전이 어떨지 상상해 봤다. 나스리드 궁전에 못 들어간 게 다시 한 번 억울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스리드 궁전'의 축소판을 본 것 같아 조금 안심도 됐다.

알함브라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벌써 5시가 넘었다. '알함브라'라고 쓰여있는 입구 간판 앞에서 아주 촌스러운 '증명사진'을 찍고(아마 나스리드 궁전에 못 들어간 게 억울해서 기를 쓰고 찍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오자마자 줄 서고 기다리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 '나스리드 궁전 야간 입장권을 사? 말아?'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루종일 엄마 아빠 따라다니느라 고생한(사실 천방지축 까부는 은형이 건사하느라 엄마 아빠가 더 고생했지만) 아이들 생각하니 도저히 안되겠다.
결국 우리는 나스리드 궁전은 포기하고 알함브라가 있는 언덕을 내려왔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황혼이었다. '알함브라'는 기독교도들이 득세하면서 스러져 가던, 황혼기의 나스리드 왕국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잠깐의 감상에 젖었다가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라나다의 옛 시가지인 알 바이신에서 가서 구경도 할 겸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엄청나게 좁은 돌 바닥 길을 몇 번 돌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애매한 시내 중심가까지 가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음식점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한 번의 '실패'를 겪어야 했다. 스페인 레스토랑에서는 '이상하게도' 밤 9시부터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고 여행 안내서에 쓰여 있었던 게 기억 나서 약간 불안했었는데, 역시나였다. 들어가는 레스토랑마다 밤 8시, 혹은 9시에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몇 번 헤매다가 백화점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백화점 레스토랑은 그런 제한 없이 하루종일 영업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마침 세일이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다니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 이 백화점은 1층에 도서와 음반 코너가 있고, 손님이 굉장히 많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나왔다.
결국 우리는 그라나다 시내 한복판에서, 이름은 잊었지만 스페인판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 푸드 점에 들어가서 햄버거와 감자 튀김으로 저녁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래도 영국서 먹던 버거킹 와퍼보다 훨씬 맛있네. 스페인이 음식 재료가 좋아서 그런가 봐.’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점심도 못 먹었던 참이라 맛없는 영국의 ‘피시 앤 칩스’를 갖다 줬더라도 아마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을 테지만.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라나다에 가서 하루종일 알함브라 밖에(그것도 핵이라는 나스리드 궁전은 빼고) 보고 온 게 없는 셈이라 약간 허탈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기는 했지만.
실패로 점철됐던, ‘여행 안내서를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그라나다 여행. 나는 늘 여행은 다음에 볼 걸 남겨놓고 오는 게 좋다고, 그래야 여운이 남는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그라나다에는 너무 많이 남겨놓고 온 것 같다. 아! 그라나다, 정말 언젠가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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