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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땀과 눈물이 아름다운 사람들

남상석

입력 : 2008.01.03 15:45|수정 : 2008.01.03 15:50


일기에나 적으면 제격인 영화 감상문스러운 글을 외람되게 여러분들에게 써올리며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제 개인의 취향을 내세우기보다는 글을 읽는 분들이 영화를 고를 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드려야겠다는, 그래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인지라 어떤 영화는 보기도 전에 괜히 싫어지기 시작해, 보고 나서도 ‘역시 그렇지’ 한다거나, 어떤 영화는 제목만 듣고 필이 꽂혀 예고편을 접하거나 보도자료를 접할때도 적극적으로 읽고 보고, 시사회 가서는 '역시 좋군'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 유명한 음식점 평론가의 블로그 대문에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상호와 위치만 참고하시고 맛 평가는 20%만 믿으세요. 제 입맛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는 분들도 참고만 하는 수준에서 활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구질구질 서두를 다는 이유는 이 영화에 제가 꽂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임순례 감독은 충무로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몇 안되는 여성감독 가운데 한 분입니다. 저에게는 인생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로 깊게 각인되어 있어,  1996년작 [세 친구]의 비디오를 어렵사리 발품팔아 구해 조악한 화질에도 불구하고 참 재미있게 보았고 2003년 국가인권위 프로젝트로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서 임 감독이 만든 못생기고 뚱뚱한 실업고 여고생이 외모 때문에 취업현장에서 차별당하는 내용의 '그녀의 무게'도 여섯 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엔딩 크레딧에 살짝 나오는 촬영현장 에피소드도 무지하게 웃겼습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찌질한 인생의 낙오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며 절망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한줄기 희망을 제시하는 노곤한 엔딩까지 버릴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저는 임 감독의 '왕 팬'입니다.

올림픽이건 아시안 게임이건 1등과 금메달에만 환장하는 우리 사회에서 은메달에 머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팀을 소재로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여성 스포츠 영화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7년 만에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고편만 보고도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하더니 지난 해 마지막 금요일 시사회에서 영화를 온전히 처음 접하고 아주 약간의 몇몇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역시!’하는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변변한 실업팀조차 없어 맘놓고 뛸 공간도 없는 여자 핸드볼 선수들은 실업팀만 수백개인 유럽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올림픽 메달을 따면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니 관심이니 떠들어대지만 그때뿐이고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미숙(문소리)와 정란(김지영)은 국내 리그에서 어렵사리 우승을 하지만 바로 그날 몸담고 있는 실업팀이 해체된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졸지에 우승 축하연은 씁쓸한 송별연이 되고 남편이 함께 비교적 잘 나가는 설렁탕집을 하는 정란은 현역시절 경기 일정에 맞춰 생리 조절을 하느라 마구 먹은 호르몬제 때문에 불임으로 고민하는 것 빼고는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지만 남편이 벌인 사업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빚쟁이를 피해 도망다니는 미숙은 앞길이 캄캄합니다.

일본리그로 건너가 실업팀의 감독 겸 선수로 뛰고 있는 혜경(김정은)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에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는데 신진 위주로 짜여진 선수들의 수준에 실망하고 한때 호흡을 같이 했던 동료였던 미숙에게 합류를 권유합니다. 해체된 실업팀에서 직원으로 채용해준다는 말 믿었더니 마트에서 야채 파는 비정규직으로 하루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미숙에게 국가대표는 그림의 떡, 메달 포상금이라도 미리 땡겨주면 생각해보겠다는 미숙의 조건을 혜경이 성사시켜주며 어린 아들을 데리고 태능 선수촌에 들어갑니다. 노장과 신진 선수들이 겨우 호흡을 맞춰갈 즈음 협회는 여자 감독이 못 미더웠는지 유렵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남자 대표선수 출신 승필(엄태웅)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고 혜경은 그 밑에서 코치 겸 선수로 뛰어달라는데 협회에서 내건 경질 이유가 ‘여자인데다 이혼 경력까지 있어서...’ 하는 말에 분개합니다. 새로 부임한 감독은 같은 연배인 노장 아줌마 선수들과 티격태격하며 히딩크 식 새로운 과학적 훈련법을 도입하는데 이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메달은 커녕 조별 예선 통과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영화같았으면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줄여야 하겠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덴마크와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그때의 승부만큼은 명승부였다는 사실은 자명하니 더 나가도 되겠지요.)

우선 각각의 인물들이 마치 우리가 왠만한 내력과 속사정을 알고 있는 주변의 가족, 친척, 친구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어려서 운동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의외로 순진 내지는 순수한 면이 많은데 그런 성격은 '대안 없는 명 골키퍼'인 노처녀 선수 수희(조은지)가 선보는 장면에서 제대로 표현합니다. 영화의 긴장을 풀어주는 넉넉한 웃음의 많은 부분은 수희와 뽀글머리에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무장한 정란이 책임집니다. 정란이 평생 소원이던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수희와 같은 방을 쓰면서 밤늦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통화를 하는 장면, "태능에 와있다 아이가. 머라꼬? 갈비? 아니~ 선수촌...국대(국가대표)"하는 장면도 웃기지만 그 뒤에서 잠못자고 몸을 뒤틀어대며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조은지의 연기도 압권입니다.

정란의 남편이 몰래 해다준 보양식이 '개소주, 흑염소, 자라 등등'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서 집어넣었다는 자랑에 미숙이 얼른 집어다 얼굴을 찡그리며 한사코 거부하는 아들 입에 쳐넣는 장면은 여러면에서 비판받고 때로는 조롱거리로 전락하지만 우리 사회를 이만큼 끌어오고 지탱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아줌마스러움을 온전히 표현해 낸 명장면입니다. 문소리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뜯는 마지막 명장면으로 유명한 [사랑해, 말순씨]에서 아줌마 연기를 천연덕 스럽게 하더니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더군요. 이어지는 보양식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번듯하던 혜경까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영화의 성격에 맞는 감독의 탁월한 결단으로 보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머리 하나씩 더 붙어있고 몸통은 두배나 되는 유럽의 덩치 큰 선수들을 물리치고 맞선 결승전, 체력은 바닥난지 오래고 각종 부상으로 온몸이 멍투성이지만 선수들은 마지막 힘 하나까지 짜내고, 연장을 거쳐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결국 안타깝고 아쉬운 패배로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바로 그 순간이 생애 최고의 순간이 아니냐는 화두를 안겨줍니다. 승패를 가르는 승부던지기를 표현한 장면도 일반적인 표현방식과 달리 주인공은 프레임 아웃되고 골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얼른 골대쪽으로 팬하거나 화면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변을 채운 양팀 선수들의 모습에 아무 소리를 넣지 않고 슬로우로 처리한 것도 영화의 스타일과 맥락에 잘 어울리는 표현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엔딩 크레딧... 당시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과 감독 인터뷰에 이어 선수들의 신묘한 자세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어지는 경기장면 스틸 사진들은 요근래 본 한국영화 엔딩 가운데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멋진 엔딩입니다. 뛰어난 인물 구축과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촘촘하게 짜여지고 인생의 축소판인 스포츠와 유기적으로 잘 결합시킨 세공솜씨로,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중시하는 풍조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암시에서부터 시작해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로까지 자리잡아가는 요즘 땀과 열정을 쏟아붇고 눈물을 흘리는 과정의 아름다움에도 의미를 부여하자는 외침이 들리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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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약간의 몇몇 아쉬움은 32억원이라는 순제작비가 들었다는데, 이 정도 스케일에 참 알뜰하게 찍은 편입니다. 한국영화 환경이 어렵다보니 그러했을텐데, 이 영화가 투자 호시절에 좀 더 많은 돈을 들여 - 물론 들인 돈과 영화의 질은 비례관계가 아니지만- 좀 더 좋은 때깔로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습니다. 한때 호시절, 남의 돈 쉽게 수십억 땡겨 돈으로 처발랐다가 쪽박찬 영화들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같은 영화에게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출연 배우들이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처럼 보이기 위해 훈련하는 장면을 담은 메이킹 화면을 보고 배우들 인터뷰를 보니 정말 고생했더군요. 여배우들은 몸은 힘들었지만 모처럼 다이어트 걱정 안하고 맘껏 먹어서 좋았다고도 하고...그러나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 닭 가슴살 같은 제한된 종류만 먹어야 했답니다. 실제 화면으로 보면 야리야리한 여배우들이 아니라 매우 건장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원래 결승전 경기장면은 유럽 현지 로케이션으로 촬영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국제 핸드볼 대회 참석차 우리나라에 온 덴마크 팀을 섭외했고 취지에 적극 동참해 귀국을 미루고 국내에서 찍어 제작비를 많이 절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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