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첫 학기를 마치고 며칠 전부터 방학에 들어갔습니다. 영국 수업석사과정은 1년이 세 학기로 나뉜다고 말씀드렸었죠? 이제 3분의 1을 마친 셈입니다. 방학 때도 해야 할 숙제가 있지만, 일단은 한숨 돌리고 좀 쉬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음악회에도 다녀와서 이 글을 썼습니다. 블로그(https://ublog.sbs.co.kr/shkim0423)에도 올린 글입니다. 지난 2월에도 '김기자, 주책없는 아줌마 되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드린 적 있는데, 이번 글은 그 속편입니다. 이번에는 제 딸 은우까지 데리고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고 왔습니다. 파란만장 안스네스 만나기. 들어보실래요? (아참, 늦기 전에 송년 인사도 드려야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첫 학기 종강 1주일 만에 내야 하는 에세이를 일단 마무리 한 뒤, 몇 달 전부터 별러 왔던 공연을 가기로 했다. 버밍엄 심포니의 송년 음악회였다. 버밍엄 심포니도 좋지만, 내가 이 음악회를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건 이 공연에서 협연할 피아니스트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지난 2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독주회에 갔다가 완전 반해버린 그 안스네스다. (위의 사진은 그 때 찍은 것이다.)
12월 15일 오후 3시, 버밍엄 심포니홀. 미리 예매하지 않고 현장에서 표를 사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매표 상황을 확인해 보니 매진은 아니어서, 공연 당일 남은 표를 학생들에게 파격가로 제공하는 'Student Standby' 티켓을 사기로 한 것이다. 에세이 제출 기한이 사흘 남은 남편은 집에서 은형이를 데리고 에세이를 마무리하기로 했고, 나는 은우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집 근처 코벤트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버밍엄 뉴 스트리트 역에 도착하니 2시. 여기서 공연장까지는 차 타기는 너무 가깝고 걸어가기는 좀 먼 길이다. 마침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나라의 장터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길을 통과해야 했는데, 주말이라 나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 은우를 채근해서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거의 2시 반. 표를 사고 나서 요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급했다.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이 길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중년층 이상 관객들이다. 은우 또래의 어린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내 차례. 매표소 직원에게 물으니 표는 아직 여유가 있다. Student Standby 티켓을 살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있단다. 후유. 다행이다! 내 학생증을 제시하니 R석 중 남은 자리를 4파운드에 살 수 있단다. 그럼 은우는?
매표소 직원은 은우는 R석 정상가인 31.5파운드를 내라고 했다. 어린이 할인은 없느냐고 했더니 없다고 한다. 사실 한국의 음악회 가격에 비하면 이 정도면 저렴한 편이다. 내가 많이 할인 받았으니 그냥 살까 하다가 다시 한번 '애도 프라이머리 스쿨(우리나라의 초등학교) 학생인데, Student Standby 가격을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매니저에게 물어보러 갔다. 아마 이렇게 어린이가 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나 보다. 잠시 뒤 돌아온 직원이 은우도 4파운드만 내란다. 야호! 횡재한 기분이다. 정상가라면 63파운드 내야 하는 R석 두 장을 단 8파운드에 산 것이다. 1파운드가 1,900원쯤 하니까 두 사람이 1만 5천원 정도만 낸 셈이다.
표를 받고 돌아서니 공연 시작 15분 전. 배가 고프다는 은우를 데리고 구내 매점으로 갔다. 이번에도 줄이 있어서 기다려야 했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고 나니 공연 시작 10분 전. 대충 먹고 화장실에 가니까 3분 전. 사실 한국에서는 회사 일 끝내고 더 급하게 공연장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어간 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겼다. 화장실에 들어간 은우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은우가 난감한 목소리로 '엄마, 벨트 때문에 바지를 못 내렸어' 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우는 평소에 벨트를 잘 하지 않는데, 며칠 전에 새로 사 준 벨트가 익숙하지 않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은 있다가 쉬는 시간에 가고 지금은 일단 공연장에 들어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소변이 급하단다. 결국 내가 들어가서 도와줬는데, 겨울이라 옷을 겹겹이 입은 데다 벨트를 꼭 끼게 해 놓아서 풀기가 어려웠던 거였다.
겨우 벨트 문제를 해결하고, 급하게 화장실을 나와 로비를 가로질러 뛰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출입문은 1번. 공연장 안내를 맡은 직원이 다급하게 뛰어와 표를 꺼내는 우리를 보더니 '진정하라'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안내 직원이 중간 문을 여는데, 막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의 첫 부분이 연주되는 게 들린다. 으악.
"지금은 안되겠어요. 첫 곡이 20분쯤 걸리니까 그 이후에 들어가세요."
어찌나 허탈한지. 나도 모르게 은우에게 '그까짓 벨트 하나 못 풀어서 이렇게 됐냐'고 타박을 주고 말았다. 은우가 풀이 죽어 '엄마, 미안해' 하는데, 내가 화를 낸 게 미안해졌다. 할 수 없다. 첫 곡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데 안내 직원이 우리 보고 따라오라고 한다. 라디오 룸으로 안내해 주겠다며.
직원을 따라서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니 공연장 객석 뒤쪽에 설치된 스튜디오가 나왔다. 앞쪽이 넓은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무대가 잘 보인다. 아마도 라디오로 공연 실황 중계나 녹화할 때 쓰는 스튜디오인 것 같다. 소리도 아주 잘 들렸다. 여기서 공연을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객석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풀이 죽었던 은우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이건 무슨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었지, 하고 연주를 들으면서 조잘거렸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를 나와 출입문 앞으로 갔다. 직원이 웃으면서 우리를 객석으로 안내해줬다. 객석은 1층 중앙.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이 자리에 8파운드 낸 걸 다시 떠올리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피아노를 무대로 가져오고, 자리 배치를 다시 하는 시간이라 여유가 좀 있었다.
드디어 안스네스가 무대로 나온다. 올해 2월에 봤으니 불과 10개월 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다른 나라에 와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가 노르웨이 출신인 만큼 자연스럽게 '장기'처럼 된 곡이다. 음반은 있지만, 안스네스의 그리그를 현장에서 듣는 건 처음이다.
그리그의 협주곡을 안스네스의 연주로 들으니 또 새롭다. 안스네스의 연주에서는 '북구의 청정함'이 느껴진다고들 한다. 나는 안스네스의 연주를 들으면 노르웨이에 가고 싶어진다. 그의 음악에 녹아있는 듯한 노르웨이의 대자연을 직접 보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과에는 노르웨이 출신의 튜터가 한 명 있는데,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안스네스 때문에 노르웨이의 자연을 보고 싶어졌다.'고 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의 자연'을 얘기할 때, 영국 생활 10년이 다 돼가는 그 튜터의 표정은 정말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안스네스와 그 튜터가 좀 닮은 것도 같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 ??로는 뜨거운 격정으로, 때로는 투명한 서정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안스네스의 연주는 어느새 끝나버렸다. 몇 번의 커튼 콜 끝에 안스네스는 퇴장했고, 이로써 공연 전반부는 끝났다. 내가 은우에게 '좋지?' 했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다시 공연이 시작됐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이다. 이 공연은 엘가의 탄생 150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공연장 로비에는 엘가를 '웨스가 낳은,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묘사한 배너가 놓여 있었다.
이번 곡에서는 지휘자 사카리 오라모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사카리 오라모는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다. 사이먼 래틀 이후 10년 동안 버밍엄 심포니의 예술 감독을 맡아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9월에도 버밍엄 심포니의 공연을 봤지만, 그 때는 객원 지휘자인 바실리 시나이스키가 지휘봉을 잡았기 때문에 사카리 오라모를 공연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카리 오라모는 사진으로는 굉장히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생겼다. 10년간 단원들과 호흡을 맞춰온 만큼, 여유 있게 오케스트라를 리드하는 것 같다. 오케스트라의 기본기도 탄탄하다. 사카리 오라모의 지휘 동작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강약 대비가 뚜렷했다.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 했다.
이번 시즌이 사카리 오라모의 임기 중 마지막 시즌이다.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가 그의 후임으로 버밍엄 심포니의 지휘봉을 잡는다.) 버밍엄 심포니는 이번 시즌에 시벨리우스 시리즈를 진행했는데, 핀란드 출신의 사카리 오라모가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로 음악계의 관심을 끌었다. 오늘 연주를 보니 시벨리우스도 좋았을 것 같다.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은우는 지난번 김선욱 군의 첼트넘 연주회에서 봤던 대로, 발을 굴러가며 박수를 쳤다. 몇 차례 커튼 콜이 이어졌지만, 앙코르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본 연주회들이 다 앙코르가 없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가 퇴장한 뒤 한동안 앉아있다가 객석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 바로 일어나서 퇴장했다. 관객들도 별로 앙코르를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연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공연장을 나오니 로비에서 안스네스의 사인회가 있다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국까지 싸 가지고 온 안스네스 음반을 좀 가져올 걸. 이왕이면 음반에 사인을 받으려고 구내 음반가게에 음반을 사러 갔다. 집에 없는 걸 고르다가 'The Long, Long Winter Night'이라는 제목의 음반을 샀다. '긴긴 겨울밤'이라는 제목이 굉장히 매력적이기도 했다. 요즘 듣기에 딱 좋을 것 같다는 느낌. 그리그를 비롯한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주로 소품들--을 연주한 음반이다.
음반을 사서 나오는데 앗, 어느새 사인을 받으려고 서있던 사람들의 줄이 없어졌다. 사인을 받는 관객들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확실히 한국의 클래식 음악 관객들이 이 곳 관객들보다 훨씬 젊고 적극적이긴 한 것 같다. 사인회가 벌써 끝났나, 안스네스가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안스네스는 아직 가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있다. 급히 음반 포장을 뜯어내고 안스네스에게 다가갔다.
음반을 내밀어 사인을 받고 나서 올해 초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했을 때도 만났었다고, 방송국 기자인데 그 때도 사인회 끝나고 잠깐 얘기 나눴었다고, 지금은 1년 예정으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더니, 기억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으면서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한다. 내친 김에 지난번 공연 때 그랬던 것처럼 사진도 찍었다. 이번에는 은우도 함께.(그러고 보니 나는 지난 2월 공연 때 입었던 외투를 이번에도 또 입고 갔다.)

그러고 나니 바로 옆에 앉아있었던 지휘자 사카리 오라모한테 미안해졌다. 사실 안스네스가 사인회 끝나고 금방 가버릴까 봐 걱정하느라 바로 옆에 앉아있는 지휘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인 받을 음반도 없고, 급한 김에 이번 시즌 전체 공연이 나와있는 프로그램 북을 내밀고 나서는 어디다 사인을 받아야 하나 난감해 했더니, 친절하게도 오늘 공연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찾아서 사인을 하고는 '20페이지!'하고 웃는다. 오늘 공연 참 좋았다고 얘기하고 돌아서면서, 내년 1월초에 학교 내 워릭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버밍엄 심포니 공연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왼쪽, 음반에 받은 안스네스 사인/오른쪽, 프로그램 북에 받은 사카리 오라모의 사인.
은우 손을 붙잡고 버밍엄 심포니 홀을 나서니 이제 오후 5시 좀 넘었는데 바깥은 벌써 캄캄해졌다. 하지만 곳곳에 넘실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마음을 들뜨게 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으로 걸어가면서 흐뭇한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 정말 보람차게 보냈다!
은우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남편에게 '안스네스랑 사진도 찍었어' 하고 자랑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엄마, 엄마는 안스네슨가 뭔가 그 피아노 치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으면 결혼하지 그랬어?' 해서 나를 웃겼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엄마는 안스네스 음악이 좋아서 팬이 된 거야. 그건 누굴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라니까' 하고 핀잔을 줬더니, 남편은 옆에서 한 술 더 뜬다.
'야, 그게 엄마만 좋아한다고 되는 일이냐? 엄마만 좋아하지, 그 아저씨는 엄마 안 좋아해!"
지난 2월에 안스네스 독주회를 보고 나서 썼던 글의 제목은 '김기자, 주책없는 아줌마 되다'였다. 이번에도 나는 다시 '주책없는 아줌마'가 되고 말았나 보다. 이 먼 나라 영국까지 와서 말이다. 게다가 그걸 딸한테까지 들켜버리고 말았다.
은우 손을 붙잡고 버밍엄 심포니 홀을 나서니 이제 오후 5시 좀 넘었는데 바깥은 벌써 캄캄해졌다. 하지만 곳곳에 넘실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마음을 들뜨게 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으로 걸어가면서 흐뭇한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 정말 보람차게 보냈다!
은우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남편에게 '안스네스랑 사진도 찍었어' 하고 자랑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엄마, 엄마는 안스네슨가 뭔가 그 피아노 치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으면 결혼하지 그랬어?' 해서 나를 웃겼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엄마는 안스네스 음악이 좋아서 팬이 된 거야. 그건 누굴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라니까' 하고 핀잔을 줬더니, 남편은 옆에서 한 술 더 뜬다.
'야, 그게 엄마만 좋아한다고 되는 일이냐? 엄마만 좋아하지, 그 아저씨는 엄마 안 좋아해!"
지난 2월에 안스네스 독주회를 보고 나서 썼던 글의 제목은 '김기자, 주책없는 아줌마 되다'였다. 이번에도 나는 다시 '주책없는 아줌마'가 되고 말았나 보다. 이 먼 나라 영국까지 와서 말이다. 게다가 그걸 딸한테까지 들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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