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전격적으로 '연대'를 선언한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와 무소속 정몽준 의원의 관계는 그 동안 대중들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사이로 알려져왔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보면 현대건설 회장 출신인 이 후보는 정 명예회장의 '동반자'로서 현대의 성장 신화를 사실상 함께 썼고, 정 의원은 정 명예회장의 아들로 역시 현대그룹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이처럼 세칭 '현대가'에서 이 후보가 사실상 '양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만큼 이 후보와 정 의원의 관계는 형제처럼 가까울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둘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정 명예회장이 1991년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 이 후보는 그의 대선 출마를 만류한 데 이어 경쟁자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현대가에선 이 후보에 대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공공연히 했다. 정 의원 역시 심정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그룹에서도 특별히 개인적 만남을 갖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 후보가 민자당으로 간 이후 최근까지 단 한 차례도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3일 이 후보와 정 의원의 회동에 배석한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은 "두 분이 약 20년만에 처음으로 만나 2시간 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이 후보는 65년 현대그룹의 모태이자 '플래그십'인 현대건설에 입사해 77년 정 명예회장의 형제들을 물리치고 회장직에 오를 만큼 정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정 의원은 78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87년 회장을 역임했다.
현대그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은 이후 정계에 몸을 담는다는 공통점도 지녔지만 정치적 행보는 달리했다.
이 후보는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정 의원은 이보다 앞선 88년 13대 총선에서 무소속(전국구)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정 의원은 이어 92년 부친이 창당한 국민당 국회의원(울산 동)으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후 국민당이 해산하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5선의 관록을 자랑하고 있다.
정 의원은 정계 입문만 이 후보보다 빨랐던 게 아니라 대선 출마도 한 발짝 앞섰다. 월드컵 열기가 가득했던 지난 2002년 16대 대선에서 국민통합21을 창당해 한때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부친의 한'을 푸는가 했지만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서 결국 노 후보를 지지키로 하면서 꿈을 접었다.
이후 정 의원은 17대 국회 들어 '조용한' 행보를 거듭해왔지만 올해 초부터 'MJ(몽준의 영문이니셜)가 움직인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키로 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중 하나를 밀어줄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정 의원은 박 전 대표와 초등학교 동창이란 인연이 있는데다 '현대 일가'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만큼, 올해 초만 해도 현대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 후보보다 박 전 대표 쪽에 서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 의원은 이 후보와 박 전 대표간 접전이 벌어졌던 경선 때도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의 측근들에 따르면 정 의원은 당시 어느 한 쪽을 지지하기가 곤란한 입장이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던 정 의원은 이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결정된 8월 이후 '이명박 지지'를 고려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명예회장의 묘를 매년 찾아가면서 '진정성'을 보이려 했던 이 후보가 '현대가'에 본격적인 화해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인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지난 8월 정 명예회장의 부인이자 정 의원의 어머니인 고 변중석 여사가 별세하자 빈소를 지키며 깊은 슬픔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이후 이 후보를 돕겠다는 입장을 표명할 시기를 놓고 고민을 거듭해왔다고 한다. 지난달 10일에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의혹 보도에 대한 언론사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BBK 의혹 등에 시달리는 이 후보를 측면 지원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막후에서 정 의원의 지지 선언을 끌어낸 주역은 경선캠프 선대위원장을 지낸 박희태 의원과 최시중 고문, 강재섭 대표, 이재오 최고위원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박 의원과 최 고문은 정 의원과 자주 접촉하면서 설득을 거듭했다고 한다.
이날 이 후보와 정 의원은 시내 롯데호텔에서 조찬 회동을 갖고 '동지관계'가 될 것을 다짐했다. 회동 후 이 후보는 환한 얼굴로 정 의원에게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고, 정 의원은 "얼마 안 남았으니 건강관리 잘 하라"고 덕담을 건넸다.
두 사람은 비공개 회동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한 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절실함에 공감했고, 최근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고 박형준 대변인이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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