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24일 내놓은 조사결과는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 조사결과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한 의혹사항을 ▲중정에 의한 납치여부 ▲최고위 지시자 ▲공작목표 ▲정부의 조직적 진상은폐 여부 등 4개 분야로 나눠 조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개입 여부였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90여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3선에 성공했으나 이후 두사람은 정적(政敵)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고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의 정치활동을 집중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진실위는 보고서에서 "대선을 통해 김대중의 정치적 위상이 급상승하자 박대통령은 그의 장기집권에 최대 걸림돌로 여겨 집중적인 견제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때부터 중정이 김대중에 대해 본격적으로 집중동향 내사를 진행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당연히 사건 배후에 관심이 쏠렸고 그동안 '이후락 중정부장 지시설'과 '박정희 대통령 지시설'로 주장이 엇갈려왔다.
'중정부장 지시설'은 당시 이후락 부장이 지난 73년 3월 '윤필용 사건'에 연루된 이후 박 대통령의 불신을 받고 있던 중 김대중의 반유신 활동과 관련한 중정의 대처방안에 대해 강한 질책을 받자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회복의 최후수단으로 납치사건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윤필용 사건이란 윤필용 당시 수경사령관(현 수방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후계자로 이후락을 거론'함으로써 처벌된 사건이다.
반면 '대통령 지시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공작사항이 이후락 부장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유신체제를 맹렬히 비난하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이후락 부장에게 사전 지시를 해 실행됐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진실위는 이러한 주장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국정원 보존자료 1만2천833쪽과 김대중도서관 등 타 기관 보유자료 2천651쪽, 그리고 납치사건에 관여한 전직 중정요원 11명과 용금호 선원 4명을 포함해 모두 18명에 대한 면담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객관적 증거를 통해 이후락 부장이 중정 공작부서에 납치공작을 추진토록 지시했다는 것은 명확하게 확인됐으나 박 대통령이 사전에 납치지시를 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사건의 핵심자료인 'KT공작계획서'가 남아 있지 않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진실위는 여러 정황과 관련자 증언 등을 종합 분석해 볼때 "박 대통령의 직접지시 가능성과 더불어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증거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정황 등을 근거로 추론한 판단인 셈이다.
진실위는 이러한 판단의 근거자료로 우선 중정에 의한 납치임이 탄로가 났을 경우 일본과 외교문제 가 발생하고 국제사회에서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과연 이후락 부장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실행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들었다.
아울러 관련자들의 증언도 제시했다. 최영근 전의원이 1980년 초 이후락 부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는 의미의 말을 직접 들었다는 것과 이철희 정보차장보가 이 부장에게 지시를 받을 당시 반대의사를 피력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했다는 전문(傳聞)증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 납치공작이 한장 진행중이던 73년 7월 27일 김대중의 반유신 활동사항을 종합한 내용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됐을 때 공작 진행과 관련된 상황도 포함됐을 개연성이 높으며 사건 발생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했고 당시 김종필 총리를 파견해 일본과의 마찰을 수습토록 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진실위는 박 대통령의 지시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핵심 관련자들의 'KT공작계획서' 작성 증언을 청취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전문내용도 확보했으나 정작 문서는 찾지 못한 것이다. 사건 발생 후 문서가 파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진실위는 "조사결과 공개를 통해 '전직 중정직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납치과정 중 겪었을 고초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면서 이로써 진정한 용서와 함께 화해의 장이 마련돼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