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봄에도 이런 비슷한 분위기가 있지만 무더운 여름의 예고편이어서 그리 호감 가지 않는데 가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휙휙 지나가 또 주말이 돌아오네요. 좋은 주말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이번 주 극장가는 [궁녀]와 [바르게 살자]의 대결이 볼만할 것 같습니다. 각각 명확한 장르로 승부하면서 나름대로 완성도를 갖췄지만 신인감독의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각각 아쉬운 점들도 있어 누가 승자가 될지 점치기 어렵군요.
궁녀(청소년 관람불가)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과 [왕의 남자] 연출부를 거친 김미정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이준익 감독에게서 효율적으로 알뜰하게 찍는 방법을 잘 배워 사극인데도 33억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제작비가 들었습니다. 궁궐을 다룬 사극에서 세트와 의상 등에 지나치게 돈을 처발라 '때깔'에만 신경 쓰다가 쪽박 찬 영화들도 간혹 있었는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싼티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준익 감독에게서 알뜰하게 찍는 법을 배우고 알뜰한 티가 화면에 안 나타나게 하는 것은 김 감독이 업그레이드 한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기자시사회에 앞선 무대 인사 때에 감독, 제작자, 배우들까지 몽땅 여자들이 등장하는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 궁녀 월령(서영희)의 시신을 검진하는 것은 궁중 CSI 즉, 의녀 천령(박진희)인데 단박에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하지만 감찰상궁(김성령)은 이 사건을 단순 자살로 처리하라고 압박합니다. 당시 궁중은 궁녀출신 희빈(윤세아)이 아들을 낳아 신분 도약을 꿈꾸지만 완고한 대왕대비 마마와 중전은 이를 저지하려 하고 궁중 내 상층부는 이에 따라 줄서기가 횡횡하고 음모와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미묘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천령은 이에 굴하지 않고 궁녀 죽음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와 비밀 앞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선시대를 관통했던 여성들의 삶에서 느꼈던 억눌림 같은 것이 과연 그것으로 그냥 끝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는가......그러니까 가상의 역사같은 느낌이기는 한데, 현대 여성들이 봐도 그런 것들을 통해서 아 자신들이 이렇게 느꼈던 사회적인 제도나 관습 때문에 느꼈던 많은 것들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 졌으면 하는 생각에서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왕과 신하, 내시 등 궁궐에 사는 남자들은 사극에서 많이 다뤄졌지만 많게는 500명까지 모여 살았던 궁녀들의 삶이 전면적으로 다뤄진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궁녀들을 통해 궁중의 암투와 억압을 범죄 스릴러 장르로 잘 그렸습니다. 천령이 과학적 조사와 명석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법칙에 충실해 관객들이 쉽게 영화에 몰입하고 따라가게 만듭니다. 당시 억압적인 분위기와 공포는 특이한 그들 만의 고문법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천령이 남장을 하고 문서보관소에 잠입하고 쫓기는 추격전 등에서는 이야기 전개 속도가 다소 빨라 몰입을 방해합니다. 원혼이 나타나 복수를 하는 공포물의 요소가 후반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는 공포가 효율적으로 작용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반대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 같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몇몇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주제의 착안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신인 감독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훌륭하기에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희빈이 낳은 생후 5-6개월 정도의 원자 아기씨의 용모가 평범함을 넘어서는지라 많은 관객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는 말을 실증하려는 감독의 의도인 줄 알았으나 제작사 측은 "그냥 스탭 가운데 한 분의 친척 아기가 연령대가 맞아서 출연하게 됐다."고 설명하더군요.)
바르게 살자((12세 관람가)

장진 감독이 각본을 쓰고 장진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은 라희찬 감독의 데뷔작이니 장진 사단의 작품입니다. 새로 부임하는 서장(손병호)이 신호위반을 했다고 끝내 딱지를 뗄 정도로 융통성없는 정도만 순경(정재영), 서장은 지역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골치아픈 은행강도 사건에 대한 민심 수습책으로 지역 언론을 이용한 모의강도사건을 계획하고 전 경찰력을 투입하는데 강도 역할을 정 순경에게 맡깁니다. 대충하다가 멋지게 진압당하는 서장의 그림은 정 순경의 빈틈없는 계획 때문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사태는 점점 커지게 됩니다.
영화는 코믹 상황극으로서 충실하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많은 웃음을 선사하면서 순경과 서장의 대결 구도도 흥미롭습니다. 방송기자의 리포팅 같은 에피소드도 엄청 웃깁니다.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은행직원들과 동료경찰이 정 순경과 벌이는 여러 가지 상황도 장진 감독 특유의 허를 찌르는 유머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점장으로 나오는 주진모([사랑]의 주진모와는 동명이인입니다.)는 무서울 정도로 심각한 얼굴에 안 어울리는 불협 화음같은 코믹 대사가 특히 흥미롭습니다.
'모의강도 훈련에서 진짜 강도보다 더 완벽한 행세를 하는 가짜 강도'라는 기발한 착상에 기초해 얼개를 짜고 거기에 코믹한 에피소드로 살을 붙여 완성해 나가는 구성인데 전체적인 완성도는 착상의 기발함에 미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진압대장과 인질 전문가의 캐릭터도 제대로 된 감초 역할을 하기에는 좀 애매해 보입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정도만과 서장의 캐릭터는 명확하지만 두 인물의 갈등과 대립에서 각자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끝까지 강도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서장은 왜 모의 훈련을 계획하는지 하는 부분에 부족한 설득력은 아쉽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재능많은 장진 감독이 일년에 여러 작품을 선보이는 것 보다는 지금보다 적게 만들면서 각각의 작품들을 더 익히고 숙성시키는 노력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레지던트 이블3: 인류의 멸망(청소년 관람불가)

호러와 액션을 함께 보여주는 이 시리즈의 3편입니다. 원래는 좀비들을 해치우는 게임이 원작이구요. 할리우드의 대표 여전사인 밀라 요보비치가 섹시하고 강인한 여주인공으로 인류의 생존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좀비들을 무척이나 잔인하게 학살(?)합니다. 실제로는 잔인하지만 그 대상이 좀비이기 때문에 도덕적 고민이나 고통에서 해방된 채 원초적인 폭력의 쾌감을 맛보게 해줍니다. 특히 양손에 칼을 쥐고 보여주는 '쌍칼 액션'과 좀비의 피를 나눠받아 맛이 간 까마귀 떼들의 비주얼은 시선을 압도합니다.
이미연이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하는 30대 여성의 주체적인 사랑이야기인 [어깨 너머의 연인]은 시사회를 놓쳐 아쉽게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다소 철학적이기도 하면서 재미있는 판타지 SF 영화 [올 어바웃 러브]와 1987년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사모아족 남자들이 나오는 코미디 [사모안 웨딩], 꿈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다룬 스포츠 영화 [골2: 꿈을 향해 뛰어라] 등이 소규모로 개봉됩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