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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트렁크에서 보물 찾기

김수현

입력 : 2007.09.10 22:27|수정 : 2007.09.10 22:29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드리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문화가 산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는 단지 '문화가' 만이 아니라, 제가 영국서 보고 느낀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오래된 물건이 좋다-영국의 '카부츠'  세일 이야기'입니다. 제 블로그(https://ublog.sbs.co.kr.shkim0423)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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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와서 남이 쓰던 중고 물품을 쓰는 데 재미를 붙였다. 가족 기숙사에는 기본적인 가구와 부엌 살림이 비치돼 있긴 하지만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에는 부족한 물건들이 많아 모두 새로 장만해야 했다. 이걸 모두 다 새 것으로 샀으면 아마 돈이 적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대부분 남이 쓰던 물건을 얻어 쓰거나 싸게 인수했다.
 
오래되고 부품이 부러져 강력 접착제로 다시 붙여 쓰기는 하지만 밥 짓는 데에는 아무 이상 없는 전기밥통은 귀국하는 한국인 가정에서 얻어온 것이고 국그릇과 냄비, 프라이팬, 국자와 뒤집개 등등 부엌 살림을 역시 귀국하는 학생한테서 15파운드에 넘겨받았다. 플라스틱 음식 보관 용기와 설겆이 그릇 보관대, 정수기 등등도 남이 쓰던 걸 얻어왔다.
 
새 물건으로 산 것은 밥 그릇과 머그 잔 네 개밖에 없는데, 그것도 영국에 와서 처음 맞는 일요일 날 '카 부츠 세일'에 가보고서는 좀 기다렸다 살 걸, 하고 후회하고 말았다.
 
'카 부츠(Car Boots)'는 자동차 뒷트렁크를 말한다. 사람들이 쓰던 물건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와서 쭉 주차시켜 놓고는 트렁크를 열고 간이 테이블 같은 것을 설치해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는 '벼룩 시장'이나 '아나바다' 정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까. 영국의 '카 부츠'는 일요일 아침 온 동네가 다 모이는 '장터' 같다. 물건을 팔 사람은 자릿세 명목으로 5파운드에서 8파운드 정도를 내고, 살 사람은 주차비 50p만 내고 들어가면 된다. (물론 차가 없으면 주차비도 안 낸다.)
 
처음 가본 카부츠에서 구경만 하는데도 너무 재미있어 세 시간이나 보냈다. 옷, 신발, 가방, 악세사리, 책, 음반, 비디오 테이프, DVD, 게임기, 텔레비전, 그릇, 가구, 자전거, 유모차, 골동품, 집에서 기른 채소와 과일, 직접 만든 잼까지, 온갖 물건들이 나왔다.
 
은우는 그림책과 장난감을 많게는 1파운드, 적게는 10p 주고 사서 입이 벌어졌다.
 
내가 건진 물건은 찻잔 세트. 고운 인상의 영국 할머니가 갖고 나온 것이다. 찻잔과 받침 6조, 개인 다과접시 6개, 큰 접시 1개, 그리고 설탕와 우유 그릇까지 포함됐다. 흰 색 바탕에 금색 무늬가 화려하게 들어가 있는데, 오래 써서 무늬가 약간 희미해진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다. 가격은 2파운드! 1파운드가 한국 돈 1900원 정도니까 4천 원이 안된다. 집에 돌아와 찻잔을 깨끗이 씻어놓고 보니 왜 이렇게 흐뭇한지.
◁ 찻잔 세트
그리고 지난 일요일, 바로 어제, 두 번째로 '카부츠'를 찾았다. 지난번에는 막연히 구경하러 갔다가 물건을 산 셈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구매 목표'가 있었다. 은형이 유모차와 은우 자전거, 그리고 찻주전자.

은형이 유모차는 금방 찾았다. 3파운드. 은형이는 바로 유모차에 앉더니,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졸렸던지 잠들어버렸다. 유모차를 먼저 사지 않았더라면 카부츠 구경도 못할 뻔했다. 자전거는 몇 대 나와 있었지만 은우에게는 좀 작은 것들 뿐이라서 다음 기회를 기약. 찻주전자는 어떤 할아버지가 갖고 나온 것으로 샀다. 흰색에 금색 줄이 들어가 있어 지난번에 산 찻잔 세트와 잘 어울릴 것 같다. 4파운드 부르는 것을 3파운드로 깎아 샀다. 카부츠는 정가제가 아니니까 가격 흥정 하는 것도 재미다.

◁ 찻주전자 세트

'목표'를 채우고 나서 돌아다니다가 건진 물건 또 하나. 바로 '피터 래빗 이야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작품 전집이다. 얼마 전 영국 북부의 관광지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여행 갔을 때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과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포터의 작품집 '오리지널 에디션'을 한 권 사왔었다. '오리지널 에디션'은 초판의 크기와 모습을 그대로 살려 출판한 것이다. 요즘은 그림을 새로 그려넣은 에디션도 많이 나오지만, 이 오리지널 판은 포터가 직접 그린 그림이 실렸고, 판형도 손바닥 만한 게 아주 앙증맞다.

그런데 포터의 작품집 23권 전권이 오리지널 에디션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1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학생이 형과 함께 이 물건을 팔러 나왔다. 은우가 먼저 이 '매물'을 발견하고는 '엄마, 엄마, 저거 좀 봐' 하고는 나를 끌고 왔다. 겉 표지가 약간 찢어진 한 권 빼고는 상태도 아주 좋다.

"이거 얼마예요?"
"다 합쳐서요?"
"네, 다 합쳐서."
"4파운드요."

내가 사온 책 한 권이 5파운드 조금 안되는 가격이었다. 흥분을 억누르고 가격을 좀 더 깎을 수 없나 한 번 더 물어봤다.

"3파운드에 안돼요?"

이 학생, 잠깐 망설이다 형한테 물어보더니 "3파운드 50p" 한다. Deal! 값을 치르고 책을 받아들고 오는데 왜 이렇게 좋은지. 횡재한 기분이다. 은우는 '엄마가 나보다 더 좋아해!' 하면서 웃었다.

◁ '피터래빗 이야기'를 비롯한 포터 작품집

카?아와 차를 끓여 새로 산 찻주전자와 지난번에 산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고, 은우와 은형이에게 베아트릭스 포터의 '다람쥐 넛킨 이야기'를 읽어줬다. 차는 향기로웠고, 책은 생생한 재미로 넘쳤다.

카부츠에서 느낀 것인데, 사람들이 쓰는 물건에는 물건들을 보면 그 물건을 쓰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이 아끼고 사랑했을 것 같은 물건에는 나도 눈길이 가고, 주인이 별 생각없이 그냥 '안 쓰니까' 갖고 나온 듯한 물건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오래됐지만 정갈한 찻잔 세트에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 추억이 배어있을 것이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힘든 우리네 세상살이, 춥고 쓸쓸한 날 몸과 마음을 함께 녹여주는 따뜻한 차 한 잔,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며 함께 하는 향기로운 차 한 잔, 그런 이야기들이 이 찻잔에 담겨 있을 것이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책에도 책갈피마다, 한 때 이 책을 읽으며 무럭무럭 자랐던 한 소년의 동심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영국 텔레비전에도 한국의 '진품 명품'과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카부츠에서 헐값에 산 물건이 알고 보니 진기한 골동품이었다는 사연이 가끔 나온단다. 나야 그런 진기한 물건을 알아볼 안목은 없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내가 산 물건들에는 앞으로 내 삶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새롭게 담겨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보물'이 될 터인데.

오래된 물건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법.

그래서 쓰던 물건이라고 해서 새 물건보다 소홀하게 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 영국에 와서 새삼 느끼는 삶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