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지지 않은 2000년 약속 어떤 것들 있나
지난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간 정상회담에서 필요성에 공감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남북 정상간 '핫라인' 설치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 제2차 정상회담에서 재확인돼 실행될 수 있을까.
제1차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합의 가운데 상호비방 중지, 개성공단과 경의선 연결 등 많은 것이 지난 7년간 즉각 또는 시차를 두고 실행됐으나, 합의와 공감에 그친 것도 상당수다.
이번 정상회담은 1차 회담 이후 진전을 토대로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등을 더욱 진척시킬 새로운 합의를 목표로 하겠지만, 연속성 측면에서 6.15 공동선언을 포함한 1차 회담 때의 합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정상 차원에서 재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남북은 1차 정상회담 직후 적십자회담,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을 잇달아 열어 상호비방 중지, 군사 핫라인 개설, 이산가족 상봉, 비전향장기수의 북송, 남북경협 활성화 등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로마 교황청 교황의 방북, 남북 당국과 민간간 통일방안 논의, 남한의 국가보안법과 북한의 노동당 규약의 적대조항 손질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방북 후 귀환한 서울공항에서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그외 여러가지 양해된 좋은 일이 있으나 (밝히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고 말해 미공개 합의도 있음을 시사했다.
다음은 이번 회담에서 재론되거나 재확인될지 주목되는 7년전 미이행 합의와 '양해' 사항들.
◇남북정상간 '핫라인' = 김대중 대통령(이하 당시 직책)은 2000년 6월 평양에 도착한 첫날 김정일 위원장과 가진 상견례 겸 첫 회담에서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 위원장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회담을 한다고 했을 때 (자료를) 많이 요구했는데 그 때 김영삼 대통령과 다정다심한 게 있었다면 직통전화 한 통화면 자료를 다 줬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김 대통령은 "앞으로는 직접 연락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2004년 두 차례 장성급회담 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우발적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한 군사 핫라인만 설치됐다.
◇통일안 논의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통일문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끝에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6.15 공동선언)고 합의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앞으로 양측 대표,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토론해보자고 얘기했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 밝힘으로써 통일안에 관해 남북당국.전문가간 구체적인 토론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김 대통령은 "이는 통일운동사에서 구체적인 합의점을 발견하기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곧이은 남남간 통일안 논란 속에 남북간 논의는 발도 떼지 못했다.
◇남북연합제 제도화 =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안에 관해 김정일 위원장이 사실상 남측의 연합제안을 받아들였다며 연합제안은 "현재의 2체제 2정부를 그대로 두고 양쪽에서 수뇌회의, 각료회의, 국회 회의를 구성, 합의기관으로 만들어 차츰차츰 모든 문제를 풀자"는 것으로 설명했다.
정상회담 한달여 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각료회담을 정기적으로 하고, 양측 동수로 국회 회담을 여는 데도 합의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북연합' 수뇌회의의 전단계로 간주할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 불발로 이뤄지지 못했으나,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이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합의문에 명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남북간에 열리고 있는 장관급회담을 각료회의의 초보단계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실질적인 장관회담이 되려면 이번 2차회담에서 분야별 세분화, 참석자의 격상 등 더욱 발전된 합의와 이행이 필요하다.
2차 정상회담에선 남북 국회회담 추진에 관한 합의 여부도 주목된다.
대북지원 사업 가운데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임을 감안하면, 남북대화에 국회의 참여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 남북은 1차 정상회담 뒤 이산가족의 서울과 평양 교환 방문, 금강산 상봉, 화상상봉을 거쳐 상봉의 상설화를 염두에 둔 금강산 면회소를 건설하고 있으며, 남한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63명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북 이산가족들의 생사와 주소 확인, 고향방문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박재규 통일장관은 국회 보고에서 "남북이 이산가족들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하고 면회소에서 상봉할 수 있도록 협의하고 협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그해 8월 방북한 남측 언론사 사장단과 오찬 자리에서 "내년(2001년)에는 이산가족들이 집에까지 갈 수 있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다만 "이산가족 문제는 준비없이 갑자기 하면...비극적 역사로 끝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 수 있다. 우리는 50년간 서로가 지워버릴 일이 있는 처지다...너무 인간적인 것과 동포애만 강조하면 안된다"고 전제를 달았었다.
◇서울 답방 = 6.15 공동선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했고, 김 위원장 본인도 남측 언론사 사장단에 "적절한 시기에 답방하겠다"고 거듭 확인했지만, 불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공항 방북 설명에서 이 문제는 "합의를 보는 데 좀 힘들었다"고 난제 중 하나였음을 시사했으나 "(김 위원장이) 우리와 '합의된 시일안'에 서울을 방문키로 결심했다"고 밝혔었다.
그 한달여 뒤 정형근 의원은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6개월에 한번씩 만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서울 답방이 늦어도 내년초에는 이뤄질 것이라는 게 책임있는 당국자의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답방이 결국 무산된 배경과 관련, 주목되는 것은 김 위원장이 2001년 5월 방북한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와 회담에서 밝힌 입장.
그는 서울 답방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면서도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하겠다. 미국이 한국에 갖고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가 새로 들어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대미관계가 개선되는 상황일 때는 '개방'형 행보를 보이고, 대립적인 상황에선 '은둔'형으로 돌아가는 김정일 위원장 대외행보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임기말인 2000년 12월 북한과 미사일 협상 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막바지 단계이던 중동평화 협상 때문에 방북을 포기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4년 6월 발간한 자서전에서 "내 임기가 10주 남았었는데, 방북하려면 한국과 일본, 중국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1주일 이상 소요될 터였다"며 "아라파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생산 중단 협정을 맺기 위해선 북한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아라파트는 '이번에 중동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면 또 5년이 걸릴 것'이라며 가지 말 것을 호소했다"고 회고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 방??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미관계 개선을 적극 권하고 이를 수용한 김 위원장의 뜻이 미국에 전달된 데 따른 것이었다.
클린턴의 방북이 이뤄졌더라면 그 방북의 후광을 업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정형근 의원의 주장처럼 늦어도 2001년 초까지는 이뤄졌었을 수 있고, 그랬다면 갓 출범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클린턴은 임기 10주를 남기고 방북을 검토했었지만, 현재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1년 넘게 남았다.
9월 열리는 북핵 6자회담과 10월2~4일 예정된 남북정상회담, 이어 10월 중순 6자 장관회담 등의 결과가 김정일 위원장의 대외 행보와 부시 대통령의 대북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역사의 예상'은 '가정'만큼 쉽지 않다.
◇백두산.한라산 교차관광 =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환담 중 "백두산에 한 번 올라가셔야 합니다. 제가 한라산에 한 번 가보고요"라고 말하고는 김용순 당시 노동당 비서를 향해 "(백두산과 한라산) 교차관광 문제를 추진하라"고 즉석 지시했다.
이것이 그 후 김 위원장의 답방 장소로 제주도가 거론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됐지만, 일반인의 백두산-한라산 교차관광 문제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북한은 최근 백두산 관광의 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백두산 개발 사업을 본격 시행하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노동당 규약 =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 언론사 사장단에 "노동당 규약도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다"며 "김대중 대통령이 북조선에서 당대회를 언제 하느냐고 물어 가을쯤 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도 서울공항 방북 설명에서 남북정상회담 때 "국가보안법 얘기도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양측이 서로 상대를 적대 관계로 규정한 법체계를 바꾸는 문제를 논의했음을 분명히 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준비했던 당 대회가, 남북정세가 급히 바뀌어 모든 걸 다시 준비하게 됐다"고 말해 당 규약에 있는 대남 적화통일 목표 등 남한관련 문구를 개정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는 풀이를 당시 낳았었다.
김 위원장은 남한의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선 "남측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답방의 전제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김 대통령은 2001년 3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밝혔다.
남한의 국가보안법도 폐지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노동당 규약도 바뀌지 않았다.
2000년 가을 개최 예정이라던 노동당 대회는 1980년 10월 6차 대회 이후 지금까지 27년이 되도록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한은 2005년부터 남북장관급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근본문제'에 보안법 문제를 포함시켜 제기하고 있다.
◇교황 방북 = 김정일 위원장은 "교황 방북을 초청하면 좋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북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낳았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귀환 이튿날 국무회의에서 교황의 방북 초청 관련 김 위원장과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 3월 교황을 접견했을 때 방북하는 것이 어떠냐고 타진, 싫지 않다는 의중을 파악했다"며 "교황은 내가 가면 '기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교황의 방북 희망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했고, 김 위원장은 "교황의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그렇다면 오시라고 하라"고 초청했다는 것.
김 대통령은 교황의 방북 초청 문제를 공개한 당일 교황청에 김 위원장의 초청 의사를 전달토록 이정빈 당시 외교통상장관에게 지시했다.
교황청은 북측과 협의 과정에서 '가톨릭교회 인정', '가톨릭 신부의 입북 허용' 등을 전제조건으로 걸었으며, 이에 북측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교황의 방북이 무기연기됐고 바오로 2세는 2005년 4월 서거했다.
◇주한미군 = 김정일 위원장은 "통일된 후에도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은 (한반도에) 남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 이후에도 언론매체 등을 통한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주한미군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있어야 한다"는 김 대통령의 주장에 "주한미군이 북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유지군으로 지위와 성격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동의했다고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전했다.
박재규 당시 통일장관은 국회 보고에서 "6.15 공동선언에서 언급된 '자주적 해결'은 북한이 기존에 주장해온 미군 철수 주장과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다"며 남북 정상이 "진지한 대화를 통해 주한미군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북측이 언론보도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한사코 주장하고 있다는 김 대통령의 지적에 "우리의 군도 긴장으로 유지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기를 바란다"며 '내부용'이라는 뜻으로 말했다고 일본 아사히 신문은 그해 8월9일 보도했다.
◇대미, 대일관계 개선 = 김정일 위원장은 "조속한 시기에 미국, 일본과 국교수립을 하고 싶다"며 한국측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적극 지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북측도 통일을 위한 화해와 협력에 적극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해 미국, 일본과 관계개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적극 권했으며,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이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과 가까우니 적극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일은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을 통해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김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전격 시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약속해 일부 실행했으며 그에 따라 양국 정상간 평양선언도 발표됐다. 북.미관계 역시 클린턴의 방북이 구체적으로 추진됐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일관계는 일본측의 '가짜유골' 문제를 계기로 도로 후퇴했고, 대미관계는 제2차 북핵위기 발발로 후퇴하다 최근 다시 호전 국면을 맞고 있다.
◇핵.미사일 =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공항 방북 설명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핵.미사일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특히 김 위원장과 대화가 "매우 유익"했으며 "그중에는 매우 좋은 전망이 담긴 얘기도 있었다"고 말해 한반도 안보.평화 관련 일련의 논의에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시사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온 후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와 통화에서 "핵.미사일 문제가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말했다고 당시 일본 언론은 전했다.
박준영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김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이 북측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한 현안에 대해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의견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이후 부시 행정부와 대결국면에서 미사일 실험발사를 통해 자신의 발사유예 공약을 깼으며, 석달 뒤엔 핵실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평화체제 =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에서 정전태를 구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고 박재규 통일장관이 국회 보고에서 밝혔다.
이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시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답방은 불발했다.
평화체제 문제는 제2차 북핵 위기 속에서 잠복했다가 최근 2.13 합의 이행 진전에 따라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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